「전남동부지역의 친일파는 누구인가?」의 마지막 순서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고흥과 구례지역 출신 인물을 살펴보자.김상형(金相亨, 金子相亨)은 1897년 3월 3일 고흥군 고흥읍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정태(金禎泰)의 장남이다. 1917년 12월 20일 판임관 견습시험에 합격했으며, 1919년 전라남도 고
앞서 광주전남 출신으로『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은 155명이고, 전남 동부지역 인물로 순천과 여수가 각각 6명이고, 보성이 3명이라고 했다. 글을 쓰면서 더욱 세밀하게 분석한 결과, 고흥 2명, 광양 4명, 구례 4명이 더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이번에는 보성과 광양 출신으로『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을 살펴보자.김호량(金鎬樑, 金子淸)은 1923년 보
새누리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이 논란이다. 보수단체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라면서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와 역사교사들은 “국정 교과서가 아이들의 역사의식을 왜곡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 7일 역사교육연대회의는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 발행된 국정교과서인 ‘초등 5학년 2학기 사회’를
광복 70주년이다. 어느 때보다 친일 청산에 대해 많이 회자됐다. 하지만 논의만 빈번할 뿐, 친일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친일 청산의 핵심은 친일파 척결이다. 즉, 사람의 과오에 대한 정확한 책임을 묻는 것이 요체이다. 용어에서도 친일파라고 하는 것이 합당한지 의문이다. 오히려 민족반역자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광주전남 출신으로 ‘친일인명사
군․경․검 합동수사본부에서 밝힌 진상조사에 대해 경찰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박찬길 검사 사건의 주요 인물인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의 경력을 잠시 살펴보자. 최천(1900년생)은 경상도 통영 사람이다. 기미년(1919년)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었으며, 동아일보 통영지국장을 역임했다. 1927년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 김기정의 ‘한국인 교육의
순천 갑구 황두연 의원의 ‘반란’ 협력 혐의에 등장한 인물이 순천지청 박찬길 차석 검사이다. 박찬길 검사(당시 38세)는 반군이 순천을 점령할 때 인민재판의 재판장을 역임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게 처형당했다. 박찬길 검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숭의실업학교와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다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장로교 총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했
평화일보가 제기한 것은 반군 점령 기간 중 열린 인민재판 배석판사였다는 것이며, 국회에서 양국 철퇴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인민재판은 ‘반란’과 직접 관련이 있어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양국 철퇴는 ‘반란’ 사건과 무관한데도 황두연 의원이 양국 철퇴를 주장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미군 철수 문제는 이승만 정부의 정책과 반대되었다. 국내 기반이 견고하지 않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여수는 반군과 지방 좌익이 8일 동안 점령하였다. 순천은 3일 동안 점령하였다. 여수와 순천의 인명 피해 규모는 비슷한데, 학살의 참상은 순천이 더하면 더했지 못했다고 할 수 없다. 우익이나 좌익을 가리지 않고 참혹한 학살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몇몇 유명인사의 상황을 살펴보면, 순천 출신 황두연 국회의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 지역도 당연히 그 변화의 물결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느냐는 것이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를 변화시켰다. 하나는 반공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분법적 사회구조이다.
‘오동기, 송욱, 지창수’. 여순사건 주모자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반란’을 주도했다고 하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정황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창수’는 ‘반란’의 총 지휘자로 굳어져 있다. 또, 오동기와 송욱도 보수단체에서 펴낸 기록물이나 국군・경찰의 공간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언제쯤 왜곡된 사실이 바로 잡힐
1967년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1:해방 건군』에서 지창수를 ‘반란’의 지휘자로 규정했는데, 향토사학자 김계유의 증언과 글도 ‘반란’의 지휘자로 지창수를 언급했다. 김계유는 “연대 선임하사관인 지창수 특무상사가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였다.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고 등 제14연대의 봉기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하지만 김계유는 당시
제5여단 소속 모 대위가 지창수 상사의 신상이나 역할을 알고 있다는 것은 토벌사령부를 비롯하여 국방부와 정부 당국에서는 반란상황과 주도자가 누구인지 더 자세히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신문에 한 차례밖에 언급되지 않은 지창수가 여순사건의 지휘자 또는 주도자라고 다시 등장한 것은 1967년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한국전쟁사1: 해방과 건군』에서 지창
여순사건 피해자 실태조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여수와 순천 외곽지역(옛 승주군)의 ‘피해실태조사 자료집’을 1998년과 2000년에 각각 발간했다. 민간단체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헌신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이때 필자도 조금 거들었다. 현지 피해조사의 어려운 점은 “다 지난 일을 왜 다시 들춰내느냐?”는 핀잔이었다. 그리고
송욱 교장의 체포는 국방부 제7호 발표를 통해서 “반군 순천․여수 방면 중 지휘자 송욱(송옥동)은 국군에 체포되어 방금 준엄한 취조를 받고 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송욱 교장의 체포로 ‘반란사건’의 성격마저 새롭게 규정되었다. 10월 28일 공보처 차장 김형원은 기사에서 전남 반란사건의 성격을 규정하였다.“이번 반란사건의 성격은 여수14연대의
여순사건은 여수와 순천에서 인근 지역까지 빠르게 확산하여, 좌익세력과 봉기군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군인의 ‘반란’에 수세적으로 내몰린 정부와 국방부는 봉기군의 확산에 주목했다. 즉, 군인만의 반란으로 전남동부지역을 점령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봉기군에 결합한 민간인을 주시한 정부는 여순사건의 주도인물에 대한 인식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했다. 10월
지난 5월 8일 순천대학교 70주년기념관에서 ‘지리산과 빨치산, 그 역사의 기억과 울림’이란 이름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가 끝난 뒤 뒤풀이에서 순천대학교의 한 교수(역사전공이 아님)가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아주 큰 사건인데, 별 관심이 없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특히 “지역이나 지역 대학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최능진은 1949년 2월 8일 공판에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은 지지했지만, 혁명이라는 혐의사실은 부인했다. 특히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족상잔을 나는 절대로 원치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동기를 나에게 전가하는 것은 천만부당이다”고 자신의 관련성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최능진이 5․10선거에 출마한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세간의 관심으로 떠오른 사건이 혁명의용군 사건이다. 여수 제14연대 연대장이었던 오동기 소령은 1948년 9월 28일 육군총사령관 송호성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는 즉시 육군 정보국에 구금되었다. 정부는 혁명의용군 사건과 관련하여 10월 1일에 민간인 최능진, 서세충, 김진섭 등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혁명의용군
10월 21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의 첫 발표를 통해 여순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날 기사의 제목은 ‘극좌극우 공모 폭동의 성질’이었다. 다소 인용문이 길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첫 발표였으니 꼼꼼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본래 수개월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하고 반국가적 봉기군을 책동하여 일으킬 책동을 하였다.
여수 주둔 14연대에서 ‘반란’이 처음 외부로 전해진 것은 10월 20일 새벽 1시경 여수 철도경찰 여자전화교환수가 순천철도경찰서에 통지하면서 알려졌다. 여수 14연대에 통신중대가 있었음에도 상부에 보고되지 않고, 철도경찰에 의해 처음 ‘반란’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상급부대인 광주 제5여단(제4연대)에 보고된 시간은 10월 20일 새벽 1시를 넘어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