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센터 소장
지난 5월 8일 순천대학교 70주년기념관에서 ‘지리산과 빨치산, 그 역사의 기억과 울림’이란 이름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가 끝난 뒤 뒤풀이에서 순천대학교의 한 교수(역사전공이 아님)가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아주 큰 사건인데, 별 관심이 없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특히 “지역이나 지역 대학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는 것이다.

어느 역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여순사건을 강조한 것은 여순사건이 대한민국 형성 과정에 ‘반공’이란 큰 획을 그었기 때문이리라. 여순사건은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사회구조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국가폭력이 정당화되는 왜곡된 사회구조를 만들어 냈다. ‘여순사건’이 단순한 지역적 사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한편에서는 전남 동부지역의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연재지면은 무척 소중하다. 쉽고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시작했다. 그런데 글을 쓰면 쓸수록 우선적 급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섰다. 서론이 길었다. 쉽지 않고 재미없어도 많은 이해를 부탁한다는 뜻이다.

앞서 두 차례 ‘혁명의용군’ 사건을 소개했다.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데 이승만 정부가 악용한 실제적 사례로 독자의 이해를 높이고자 소개했다. 그런데 이뿐이었겠는가?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첫 발표는 10월 21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했다. 이미 몇 차례 소개하기도 했다. 이범석 총리가 발표한 아래의 인용문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하나 찾아보자.

오동기란 자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소령으로 승진하여 여수 연대장에 취임하였다. <중략> 이 자는 여수 가서 소위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공산주의 선전하는 한편 로서아 十월혁명 기념일을 게기로 전국적인 기습반란을 책동하였다. <중략> 약 二十일 전에 吳와 관련자를 검거하게 되었다. <중략> 군내에 吳와 통하든 자들은 공포심이 이러난 모양인데 일조일석에 군대 숙청이 불가능하여 이번에 모종 임무를 주어 혐의 농후한 이들을 딴 곳으로 분리할 때 공포를 느낀 자들은 지체하면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개시했던 것이다.(『자유신문』1948년 10월 22일)

혁명의용군사건 연루자인 전임 연대장 오동기와 관련된 발표이며, 여순사건의 발발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여순사건 발발 이전부터 군대에서는 숙청을 단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숙청 대상자들에게 ‘모종 임무’를 주었다. ‘모종 임무’가 무엇이었을까? 정부는 숙청대상자(혐의 농후)인 이들에게 모종의 임무를 주어 딴 곳으로 분리하려고 했다.

이범석 총리가 말한 혐의 농후한 이들은 좌익세력뿐만 아니라 이승만과 반대되는 모든 파벌을 일컫는 것이다. 즉, 숙청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다. ‘모종 임무’는 다름 아닌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하는 명령이었다. 숙청대상자로 편성된 제14연대 1대대 사병들은 이에 공포를 느껴 ‘반란’이라는 행동을 개시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수 주둔 제14연대의 제주도 출병은 ‘제주도 사태’ 진압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좌익세력의 척결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이범석 국무총리의 발표에서 알 수 있다. 제주 4․3사건은 남한 중심의 단독선거 반대와 미군정과 친일경찰의 부패에 제주도민과 남로당이 주도한 봉기였다. 즉, 제주도는 남로당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혐의 농후한 세력을 보내려고 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청천(본명 지청천)은 “금반 반란사건을 일으킨 연대는 제주도 토벌대로 수송 중에 있었든 것이라니 이것은 마치 공산군 토벌이 아니고 응원대로 보낸 격이다”면서 제14연대 제주도 파견은 잘못된 실책이라고 정부를 질책했다. 정부는 한 번에 두 가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하는 꼴이 되었다.

여수주둔 14연대 제주도 출병은 ‘남로당 숙청’이라는 큰 목적이 있었는데, 과연 이 방법밖에 없었던 것일까. 앞선 글을 되돌려보면, 여순사건 발발 20일 전인 1948년 9월 28일에 연대장 오동기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원주부대와 춘천부대의 군인들도 체포되어 있었다. 제14연대에서도 보급중대 김영만 하사가 10월 11일 체포되었다. 김영만은 남로당 세포 조직원으로서 고봉규의 밀고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영만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체포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조직을 희생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그대로 체포되었다”고 말했다.

고봉규도 남로당 세포로서 14연대 군인이었다. 고봉규가 14연대 남로당 세포를 다 알지는 못할 수 있다. 그렇다고 김영만 혼자만 밀고했을까. 그리고 김영만을 체포한 정보부처에서는 누가 14연대 남로당 총책인지를 따져 물었을 것이며, 나머지 남로당 세력에 대해서도 조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14연대에는 어떠한 조치도 없었고, 봉기로 이어졌다.

군 내부에서는 지속해서 ‘숙청’을 감행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큰 성과를 나타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에서 ‘반란’ 사건이 발발했다. 그 책임은 군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정부가 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는 변명할 소재가 필요했다. 책임을 떠넘길 매개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저자세를 보일 경우 반대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이범석 총리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 아래 좌익계열뿐만 아니라 반대되는 정파까지도 ‘숙청’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성’ 메시지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한 것이다. 책임보다는 국민을 대상으로 ‘경고’를 남발하는 사회구조의 이면에는 여순사건의 또 다른 악용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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