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다고, 그러코 허믄 쓴다냐?”낮에 있었던 얽히고설킨 일을 때때로 저녁 밥상에서 퇴근한 아내와 나누곤 했는데, 아들의 뒷말에 어머니는 어느덧 들으시고는 늘 그렇게 타박하곤 하셨다. 아들이 미덥지 못하여 앞세우는 염려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런 마음을 내려놓으시라며 앞은 이렇고 뒤는 저러한 경황을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러니, 어머니는 늘 안타까움을 품고 지내셨을 테다.1989년 ‘전교조’ 활동과 관련해 해직된 시절,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치매의 정도가 깊진 않으셨다. 그래도 깜빡깜빡 정신을 놓은 적이 없지 않기
11층 아파트 현관문을 열며 ‘타다’를 호출하려다 접는다. 외곽 쪽 소재 아파트지만 요즘은 1층 출입문 앞에서 불러도 개인택시 또한 금세 오는 듯했다. 제 2기 ‘타다 넥스트’ 기사 모집 직원과의 미팅 시간에 촉박하게 나서는 참이기도 했다. 주변의 500미터 안팎에서 출발하는 까닭에 콜을 하고도 2∼3분, 길게는 4∼5분 정도 기다리기도 한다. 사실, 택시를 타는 일이 잦지 않은 탓에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고객님 부근에 빈 차량이 없습니다’는 문자를 받는 건 짜증나는 일이었다.민규는 승차공유 서비스의 확
퇴근 무렵, 기상예보에 없던 싸락눈 몇 톨이 내렸고 그걸 보고 고민한다. 미혜도 그럴 거라고 여긴다. 첫눈 오면 만나자는 약속, 그래 커피숍 창밖으로 내리는 첫눈에 환호하며 쑥덕이던 만남이 어느덧 6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서로 꺼렸다. 미혜도 나도 결혼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는 개인적, 시대적 요인은 있다. 어쨌거나, 이걸 ‘첫눈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라고 고민했던 기억이 물론, 그동안 없지 않다. 만난 지 99일째 되는 날, 그때도 이런 싸락눈 몇 알 내리고 흔적도 없이 금세 사라지고 말았
“여보, 새가 유리창에 계속 부딪히네.”아내가 작업실로 쓰는 별채에 풍경을 환하고 시원스레 보려 벽마다 유리창을 새로 냈는데, 통유리로 된 남쪽 창문에 새가 날아와 자꾸 부딪히곤 했다. “당신이 걸어놓은 저 그림이 창에 비치는 걸까?”아내가 그린 소나무 수묵화가 창문을 통해 보였는지 유리창에 앉으려다 주르르 내려가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는 날아갔다. 같은 새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 벌써 여러 날이다. “솔거의 ‘노송도(老松圖)’에 새들이 앉으려다가 죽었다는 전설 같은 전설을 말하는 거야.”“그렇지 않다면 유리창에 앉으려고 저리
“오늘도 안 가니?”“그러게 말이다. 전쟁통에도 학교는 열렸는데.”할머니는 그러면서도 내게 얼굴을 찡그리는 엄마를 향해 그만하라는 눈짓을 보낸다.“가고 싶거덩. 근데, 오지 말라잖아.”“그러게. 우리 손주 탓할 게 아니지.”“공부할 시간 다 됐다. 빈둥거리지 말고 들어가 컴퓨터 켜라.”엄마는 책상에 앉아 있으면 공부하는 줄 아는 데 ㅋㅋ, 메롱이다. 온라인 수업과 게임방 화면을 들락날락하는 걸 모른다. 오늘은 과학 시간이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루팡루이 게임이 더 재밌다. 더 재밌는 건 친구들과 노는 거다. 얼마 전까지만
부산 출장은 늘 설렌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 추억이 되짚어지고 추억의 장소에 갈 수 있어서다. 추억의 장소인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에 한잔하게 되는 기대감만으로도 즐겁다. 출장지가 좀 까다롭기는 할 것 같지만 한두 번 겪는 일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휴일인 석가탄신일 전날이어 가족들에겐 미안했다. 마감에 쫓기다 보니 도리 없는 출장이기도 하다. 느긋한 맘으로 다녀오자며 옷깃 여민다.해군작전기지 내 미해군사령부가 있는 부산항 8부두 가까이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 취재다. 2016년 해군작전기지 부근으로 이전한 미해
형식은 4월을 보내면서 ‘내가 뭘 하고 지냈지?’ 하는 의문을 품는다. 한 달 내내, 귀연과 만나고 카톡하며 보낸 게 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게 뭐 어때서?’라며 ‘타자적 상황에 대한 지나친 배려 아냐?’ 하는 귀연의 반문에 ‘그러긴 하지만…’이라며 말꼬리를 감추긴 했다. 나름 치열하게 몸과 맘 쏟고 부으며 살았고 지금도 그러(?)하니,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자문자답하면서도 가슴 한 켠으로 치고 들어오는 부끄러움 같은, 아니 쪽팔림과 더불어 오는 낯 간지러움을 떨쳐내지 못한다.5월을 맞으면서 4월을 되새기다 아무려나
“여보, 차 한 잔 안 해? 보이차는 괜찮잖아.”소파에서 신문 뒤적이고 있는 신 선생에게 취업해 곧 출근을 앞두고 잠시 집에 머물러 있는 딸과 점심 식사 뒤 차 마시며 담소하는 식탁으로 오라, 한다. “나, 들어갈래.”“어휴, 고지식하기는.”“왜 그렇게 말해?”“소금과 물은 필수잖아. 단식하면서도.”“전면단식 하는 것도 아니고 한 낀데, 뭘.”“집에서 누가 보는 것도, 확인하는 것도 아닌데 차도 안 마신다니까 그렇지.”“죽기 살기로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한 끼 굶으면서, 물까지.”“반드시 제정되어야 할 법인 건 아는데, 이제 사서 고
세연이 미적거린 데다가 급식실이 좁은 탓이기도 하지만 이번 달은 3학년→1학년→2학년 순으로 급식하기에 2학년인 연주와 세연은 빈자리 찾기가 수월하지 않다. 그럴 때면, 샘들 식탁 쪽 빈자리에 앉기도 한다. 연주와 세연이 1학년 담임 세 분 샘들 옆에 앉으며 목례한다. 받는 둥 마는 둥 식사하면서 대화 나누던 샘 중 한 분의 말을 언뜻 듣고 연주는 귀를 의심한다. ‘…그러니까? 쌀만 친환경이면 뭐해.’ 하는 좀 화가 묻은 듯한 발언 때문이다. 그럼, 국과 반찬은 친환경이지 않다는 건가?“들었지, 너도. 쌀만 친환경이라잖아?”샘들이
초등 동창인 세연의 권유로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FFF)’ 4차 집회에 처음 가서부터 놀랐다. 또래인 중딩이 고딩보다 더 많아 보여서였지만 주장하는 내용이 너무 신선해 오히려 당혹스럽기까지 했다.다빈은 5차에 이어 6차 FFF부터 함께하기로 했다. 이후, 행동 변화 요구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몇 가지를 실천하기가 사실 쉽지 않았다. 세연이 37분 걸어서 오지만 다빈은 9분 거리였기에 차 타지 않고 등하교하기는 문제일 수 없었다. (수돗)물 아껴쓰기 또한 어떻게 기후위기와 연관되는지 이해하면서 집안
기수는 차를 몰고 절에 가면서도 눈물이 났다. 장맛비는 여전히 장대처럼 퍼부었다. 와이퍼를 최고로 돌려도 시야가 흐렸다. 눈물까지 겹쳐 운전이 쉽지 않았다. 같이 가겠다고 나서는 아내를 떼어놓고 온 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이러다 절벽으로 구르지 싶은 거였다. 올라가는 길은 그래도 괜찮지만 장대비가 계속된다면 내려가는 길은 더 위험할 게 뻔했다. 오십세 두의 소 중 겨우 열한 두가 살아 있다니, 빚 감당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아내가 기어이 함께 가겠다고 하는 의중 또한 혹 기수가 그동안 일군 업(業)을 업(殗)으로 여겨
코로나19로 거듭 연기하다 4월 들어 겨우 개학해서 아이들 얼굴 익히고 이름 새기며 관계 익어가던 6월 둘째 수요일이었다. 세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세연이 이번 주 금요일에 체험학습 하겠다고 해서 신청하니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중2 교실이 늘 천방지축 상황이긴 하나 코로나19로 어수선하고 들쑥날쑥 오가는 날이 이어지는 터라 그나마 학교에 나오는 날만이라도 결석하지 않길 담임으로서 바라지만, 학교 가지 않고 체험학습 하겠다는 걸 허용하는 세연 엄마 요청 사유가 분명 합당할 거라 여겨 그러마, 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과는 무
상호가 카톡으로 보낸 글을 읽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영국 파이낸셜타임즈 기고문의 한글 번역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의 경제와 정치 그리고 문화 지형이 완전히 바뀔 거’라는 논지로, 부활하는 빅브라더의 망령을 우려했다. 확산방지 방역대책으로 벌어지는 인권침해 논란은 베이징 출신 외국인인 마류류의 두려움을 촉발했다. ‘너의유비쿼터스는쉴틈없네.지금도내가어디에서무얼하는지들여다보고있잖아.’상호는 청화대 1년 단기 어학연수생이었고, 마류류는 아시아인류문화사 전공이지만 한국어 강습생이었다. 서로 한눈에 반했다고 해
“갠지스강에 돌고래가 올라오고, 영국 웨일즈 란두드노에선 야생염소가 ‘사회적 거리 두기’ 하면서 인적 끊긴 도로를 산책했다잖아, 하하.”저녁 8시 뉴스 화면에 뜬 뉴델리의 맑은 하늘을 보며 나는 짐짓 들떴다. 이태 전, 아내와 함께 인도 여행에서 본 뉴델리 대기는 가스실 수준이었다.“농담으로 여기기엔 뼈가 있네.”“동물들도 본능적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 않을까?”“그러면 더욱 인간 세상에 발 들이지 말았어야지.”“삐딱선 타보고 싶은 동물들도 있지 않겠어? 『갈매기의 꿈』 조나단처럼.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인간들은 어찌 사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이자 연중 300일 이상 해가 뜨는 포르투갈 알가베는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다. 바이러스 X가 한바탕 할퀴고 간 이후 관광객은 아주 뜸한 상태다.“지금 나가려는데?”남편은 매일 해변으로 산책 가면서 묻기를 빠뜨리지 않는다.“잠깐 기다려. 곧 끝나.”오늘은 남편을 따라나설 참이다. 원격진료를 시작한 이래 더 바쁜 나날이다. 한국어 사용 환자만이 아니다. 유럽, 남미,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이르기까지 전신 마비 환자는 도처에 있다. 구글의 영상진료 서비스는 언어 장벽을 완벽하게 해결해 준다. BCI
‘B환자협진논의:금일오후6시,BCI협의실,시간엄수요망합니다.’환자 B는 고2 때 교통사고로 9년째 전신마비 상태인 태권도 선수 출신 청년이다. 최 원장은 김 교수의 진단 예측은 일단 접는다. BCI(Brain Computer Interface)기술전문가로 Y대학 디자인및인간공학부 김 교수 견해가 합의 과정의 변수였다. BCI재활의학과 전문의인 자신보다 줄곧 김 교수 의사가 더 반영된 협진이었다. 만족할 수준의 치유가 이뤄져 그나마 다행이다.BCI재활의학과는 잘 나가는 BCI기술전문가와 협진체계를 갖춰야 했다. 김 교수와 협진을 이뤄
“아빠, 택배 올 거야. 받아둬.”“알았어. 내용물이 뭐래?”“신발.”“신발장에 가득한데, 또 신발.”“세계에서 오직 한 켤레만 있는 신발이야.”“어이쿠, 이멜다다, 우리집 이멜다.”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가 축출될 때 대통령궁에 부인 이멜다의 신발이 3,000켤레나 있었다는 기사를 기억해 낸, 딸아이의 신발 수집 욕구에 빗댄 별명이다. “이거 알아, 아빠.”“뭘?”전화기 너머로 딸아이의 들뜬 음성이 전해졌다. “아디다스가 베트남 공장을 독일로 이전해 갔는데, 독일 공장에서는 단 한 켤레의 신발도 소비자 요구대로 만들어 준다는 거야.
싱싱한 유기농 야채 등 먹을거리를 주문한 시간대에 받는 건 채식 위주 식사를 하는 상희에겐 고마운 배송 서비스다. 오늘은 아침 6시 10분에 받았다. 아침 식사를 거른지 꽤 됐지만, 때때로 먹고 싶거나 영양 섭취 욕구를 느낄 적이 없지 않다. 아보카도 드레싱과 렌틸콩 루꼴라 샐러드에 필요한 루꼴라, 구운 호두, 레몬 3개, 호주산 누디에 코코넛 요거트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