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욱은 누구인가? 2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송욱 교장의 체포는 국방부 제7호 발표를 통해서 “반군 순천․여수 방면 중 지휘자 송욱(송옥동)은 국군에 체포되어 방금 준엄한 취조를 받고 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송욱 교장의 체포로 ‘반란사건’의 성격마저 새롭게 규정되었다. 10월 28일 공보처 차장 김형원은 기사에서 전남 반란사건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이번 반란사건의 성격은 여수14연대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데 민중이 호응한 것 같이 일반은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전남 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소련의 10월 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에 일부 군대가 합류한 것이 되는데, 그 실증으로는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서울신문, 1948. 10. 29.)”

김형원은 여순사건이 ‘민간’과 ‘좌익’이 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국민에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여수14연대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데 민중이 호응’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김형원은 이를 부인하면서 “전남 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정리한다. 이러한 인식은 송욱의 등장에서 시작하여 정부나 국군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 송욱 교장이 강연회에 연설자로 참석한다는 벽보이다.

송욱이 체포되면서 지역사회 일부 인사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시국이 시국인 만큼 드러내놓고 구명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후배 양회종이 그나마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양회종이 찾아간 사람은 당시 호남신문사 사장이었던 이은상이었다. 평소 이은상과 송욱은 가까운 사이였다. 이은상의 말인 즉, 김지회가 광주 제4연대 입대할 당시에 이은상이 신원보증을 섰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이은상도 제5여단 사령부로 연행되어 김지회와의 관계를 추궁받고 있다면서 도와줄 수 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김지회는 경비사관학교를 입교하기 전에 서울 태릉의 제1연대 C중대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동향인 이병주 중위의 추천을 받아 1947년 1월 13일경 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했다. 동년 4월 19일에 소위로 임관(군번 10505)하고, 제1연대 2대대(대대장 이병주) 부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광주 4연대 1대대 4중대 중대장을 거쳐 1948년 6월 1일 자로 여수 14연대 창설 장교로 전속되었다.

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신원보증이 필요했지만, 장교로 임관하여 부대에 부임하면서 신원보증을 섰다는 경우는 지금껏 찾아볼 수 없다. 이은상이 당시 여러 정황상 송욱을 도울 수 없기에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낸 말이라고 짐작된다.

송욱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곳은 광주 제5여단이었다. 국군에서 주요한 인물로 파악하고 지역의 전투사령부에 두지 않고 직접 광주의 여단사령부에서 조사한 것이다. 송욱이 직접 남긴 말이나 글은 없다. 그를 면회했던 양회종의 말을 빌려보면, “나 보고 반란의 주동자라고 하는데 나는 반란군 측의 연설요구를 거절하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줄곧 학교 안에만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송욱이 말했다는 근거를 찾아보자. 첫째, 당시 제14연대 12중대 중대장이었던 김형운은 사건 당시 아는 사람의 소개로 피신했는데 그곳이 여중학교 교장 관사였다고 한다. 김형운은 고흥으로 탈출할 때(25일 새벽)까지 관사에 숨어 있었다. 송욱은 김형운이 숨어 있는 동안 처남이라고 부르면서 부인에게도 그렇게 일렀다고 한다. 김형운은 송욱이 아주 잘 해주었고, 참 양순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둘째는 당시 여수여중 국어 교사였던 전병순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병순은 여순사건 최초의 장편소설『절망 뒤에 오는 것』을 쓴 작가이다. 전병순은 당시 송욱 교장을 구하지 못한 부채의식이 있다고 한다. 당시는 교장 선생님뿐만 아니라 객지에서 온 많은 선생님이 관사생활을 했다고 한다. 여순사건 당시 전병순도 관사에 있었고, 송욱 교장도 관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송욱 교장은 선생님들이 시내 나갔다오면 시내 상황을 자세하게 물었다고 한다.

이런 그가 민중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조사를 받았다. 대부분이 사형을 당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제5여단의 조사 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여하튼 송욱은 여수로 돌아오지 않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이후 어떠한 발표도 없었다. 그래서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정부는 군인 반란이라는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국군의 내부적 요인보다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반란이 발생했음을 국민에게 전달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이러한 정부의 끊임없는 노력은 송욱을 반란의 총지휘자로 만들었으며, 지금까지도 ‘반란사건’이 지역의 민중들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이미지를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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