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문창극이라는 국무총리 후보자의 강연 내용이 논란의 불씨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교회 장로이기도 한 그는 조선말-개화기-식민지-해방-전쟁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사를 자기만의 방식대로 풀어나갔다. 그런데, 강연 전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문창극은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여 발생하는 사건을 일종의 ‘숙명론적 사관’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례로, 문창극은 귀츨라
필자는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면서『임종국 평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영향으로『친일문학론』을 썼던 그는 폭로와 고발을 통해 역사의 민낯을 드러낸 재야 사학자였다. 쓸 수 있었던 건 최초의『이상 전집』을 편찬하기 위해 식민지 시기의 자료를 열람하고 정리한 내공 덕택이었다. 제도권의 정식 코스를 밟지 않았지만, 친일 연구에서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여기에는 가공할 만한 살상무기를 과시해 제2차 대전 후 세계 최강국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원폭 투하는 최후의 군사적 행동이라기보다 소련과의 외교전을 준비하기 위한 최초의 작전이었다. 원폭이 투하될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각각 4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반상회’는 식민지 시기의 ‘애국반’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애국반은 전시체제기(1937-45) 총동원체제의 구축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1937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전개되면서 애국반이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애국반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일상을 통제하고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동원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
해방정국(1945-48)은 한국현대사의 원형을 이루는 중요한 시기이다.『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 송건호가 “8․15가 도대체 어떻게 민족의 정도에서 일탈했고, 그로 말미암아 민중이 어떤 수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냉철하게 구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건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해방정국은 한국현대사의 향방을 결정지은 역사적 순간이기 때문이다.해
파시즘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형태의 반공주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를 거부하면서도 강력한 국민 통합을 이룩하려고 할 때 참조할 수 있는 극히 한정적인 역사적 경험이었다. 분단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최대 과제는 ‘국민’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이제 본론이다. 식민지 유산의 핵심은 전시체제기(1937-45)에 경험한 파시즘이었음을 앞서 강조한 바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파시즘은 거대한 집단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거대한 개인(영도자)’을 비판적 성찰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이 제창한 일민주의는 식민지 조선이 경험한 파시즘의 재현이었다. 일민주의는
식민지 유산의 핵심은 파시즘 경험이다. 해방 이후 형성된 극우반공체제는 식민지 파시즘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요인이었다. 따라서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체제에는 식민지 파시즘이 중요하게 작동하였다. 이 글의 목표는 한국현대사에서 재현된 식민지 파시즘을 살펴보는데 있다.앞서 필자는 양주삼 목사의 친일과 납북,『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판매금지 사건을
반민특위 와해 이후 친일문제는 금기의 역사가 되었다. 1966년 임종국이라는 재야학자에 의해『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친일문제는 사회적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다보니 1950년대 후반에 한 교회사학자가 쓴 책이 장로교회에 의해 판매 금지를 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인공은 바로 매산 김양선 목사. 숭실대의 기독교박물관을 세운 저명한 학자
해방 후 친일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생존을 도모했다. 남한을 뜨겁게 달군 신탁통치 파동은 친일파의 역습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친일세력은 반공의 논리를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반공의 내재화와 검열의 일상화를 수반하였다. 정부
이승만과 박정희는 집권한 지 6년 만에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필요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집권 연장을 위해서는 헌법을 바꿔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때마다 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헌법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려면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을 확보해야 하는 법. 이승만과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 결과 19
지난 호에 국가보안법의 제정(48.12.1)을 통한 국가보안법 체제의 등장을 이야기했다.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초한 국가보안법 체제는 분단체제의 강화에 큰 영향을 발휘했다. 여순사건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북을 항상 ‘북괴’로 지칭할 것을 지시했으며, ‘동족상잔’이라는 표현도 금지했다. 친일파 이종형이 운영하는 극우신문『대한일보』는 반민특위에 참여한 국회의원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다. 이들에게는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부형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결국, 대통령중심제를 원하는 이승만의 구상이 채택되었다.제헌헌법에는 이승만이 강력하게 원하던 대통령중심제가
현재 우리는 국가보안법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다. 국가보안법 체제는 사상의 자유와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합법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구조로 분단체제의 유지와 재생산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국가보안법 체제는 지난 70년의 한국현대사에서 무수히 많은 ‘벌거벗은 생명’을 양산하는 폐해를 낳았다. 국가보안법 체제는 반국가단체와 이적단체를 검거한다는
해방 이후 일제잔재의 청산은 새로운 주권정부를 수립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다. 이때 일제잔재의 청산은 주로 친일파라는 인적 청산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민중은 ‘인민재판’, ‘민중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친일파를 척결하면서 해방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해방이 되었던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8일 동안 민중에 의한 자연발생적인 친일
해방 70주년이 되었지만 친일 논쟁은 여전하다. 이는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유산이 무엇이기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먼저, 식민지 유산의 청산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친일파 처단’이라는 인적 청산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그러나 식민지 유산은 이보다 더욱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볼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