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전남동부지역의 친일파는 누구인가?」의 마지막 순서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고흥과 구례지역 출신 인물을 살펴보자.

김상형(金相亨, 金子相亨)은 1897년 3월 3일 고흥군 고흥읍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정태(金禎泰)의 장남이다. 1917년 12월 20일 판임관 견습시험에 합격했으며, 1919년 전라남도 고흥군 판임관 견습으로 재직했다. 1920년 고흥군 서기, 1921년 전라남도 고흥군 속(屬)으로 근무했고, 1924년 4월 5일과 1927년 4월 1일 전라남도 도 평의회원으로 당선되었다. 1926년 전남도시제사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했으며, 1928년 11월 28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昭和)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3년 5월 10일 전라남도 도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5년 8월 15일부터 1941년 8월 14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며, 조선총독의 자문에 적극 응했다. 1936년 8월 15일 정7위에 서위되었으며, 1937년 9월 6일에 열린 조선총독부 시국강연대회에서 내선일체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장두만(張斗萬)은 전남 고흥출신이다. 1922년 전라남도에서 도경 및 도경부보 고시에 합격했다. 1924년부터 전라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부보로 근무하다 1928년 5월 경부로 승진해 순천경찰서에서 근무했다. 1930년부터 경기도 경찰부 경무과 경부로 재직하면서 조선총독부 경찰관 강습소 조교수를 겸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발령받아 1940년까지 검열 업무를 담당했다. 1937년 12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퇴직 후인 1941년 매일신보에 사원으로 입사했고, 그해 7월 매일신보 서무부장에 임명되었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2009년 11월 8일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총 3권, 3000여 쪽으로,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일제식민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4389명의 친일행각과 광복 이후의 행적 등을 담았다.

박동호(朴東鎬)는 1891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 1912년에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4월부터 전라남도 구례군 농잠 조수로 일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판임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이듬해 판임관 견습으로 임용되었다. 1914년에 구례군 서기로 정식 직원이 되었고, 1920년 곡성군 서기를 거쳐 1923년에는 해남군 권업과장으로 승진하였다. 1924년에 광양군 서무주임으로 이동했다. 광양군 근무 중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昭和)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에는 보성군 군수에 승진 발탁되어 1935년에 퇴직했다. 1934년 11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퇴직 후 1936년부터 1940년까지 구례군 구례면장을 지냈다. 면장으로 재직하면서 군용물자 공출, 군대와 유가족 후원, 여론 환기와 국방사상 보급 선전, 국방헌금과 애국기 헌납자금 모집 등의 업무를 적극 수행하여 「지나사변 공로자 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최윤모(崔潤模, 華山潤一)는 1917년 구례에서 태어났다. 1939년 교토(京都)제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으며, 그해 10월 도쿄(東京)제국대학교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1942년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에 임명되었으며, 1942년 8월부터 12월까지 경성지방법원 검사 대리를 겸했다. 1944년 8월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를 거쳐 1945년 3월 경성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문동호(文東鎬, 文元東鎬)는 1898년 구례에서 태어났다. 1918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에서 판임관 견습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1920년에는 군서기로 승진하여 전남의 고흥군, 구례군, 영광군, 순천군, 강진군에서 근무하였다. 1934년에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였고, 진도군 군수에 임명되었다. 진도군수로 재직하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공로자 중 한 명이다. 이후 장흥군 군수와 전라남도 식량영단 운수과장을 역임하였다. 1940년 2월에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진도군수와 장흥군수로 재직하던 1937년 7월부터 1940년까지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용물자 조달, 군대와 유가족 후원, 국방사상 보급, 국방헌금 모금, 전사자 위문, 저축 장려 등의 전시업무를 적극 수행한 공로가 인정되어『지나사변 공로자 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손종권(孫宗權, 松田行正)은 1900년 구례에서 태어났다. 1918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어 고향 구례군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20년에는 군서기로 승진하여 전남 완도군, 곡성군, 제주군, 담양군, 함평군, 진도군, 영암군에서 차례로 근무하였다. 1935년 6월에는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었고, 광양군에 부임했다. 광양군수로 재직할 당시 광양군 군사후원연맹 회장을 지냈으며,『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공로자 중 한 명이다. 광양군수와 고흥군수 재직할 때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용물자 조달, 군대와 유가족 후원, 국방사상 보급, 국방헌금 모금, 각종 시국관련 강연회와 영화회를 통한 시국인식 강화, 국채소화와 저축 장려 등의 공로로『지나사변 공로자 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1942년에 담양군수로 재직 중이었고, 이때 고등관 5등으로 종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4회에 걸쳐 전남동부지역의 친일파를 살펴보았다. 게재한 인물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1994년부터 진행해 온 사전편찬 작업으로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ㆍ찬양하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한국인의 목록으로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으로 편찬했다. 총 3권, 3000여 쪽에 달하는 친일인명사전은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일제식민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4389명의 친일행각과 광복 이후의 행적 등을 담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했다. 해방 70주년에 맞는 역사 바로 세우기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