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읍성이 대부분 1895년 이후 읍치가 되어 일제강점기에 성곽의 훼철을 계기로 도시의 확산을 가져왔던 것처럼 광양의 경우도 마차가지이다. 광복 이후 광양은 조선시대 읍치의 행정구역이 면에서 읍으로 바뀌었지만 도회의 상업적 기능이 활발해진 것은 198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광양의 뒤늦은 산업화는 가파른 도시 변화로 이어졌고, 유구가 뚜렷하게 남
여수는 근대기에 다양한 변화를 통해서 도시 골격이 형성되었다. 1895년 수군절도영이 혁파될 때까지 조선 수군의 주진으로 남해안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라좌수영의 주적은 일본이었으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주적을 상실하고, 지역 방어를 위해 형성된 조선시대 성곽 도시의 기능을 잃게 된다. 여수는 1895년 전라좌수영이 패쇄될 때까지 독립된 행정
그동안 순천 도심의 변화를 주제로 글을 썼는데, 이제 순천과 인접한 벌교와 광양, 여수의 도시변화 과정과 성곽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필자가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이나 ‘한국도시설계학회’에 발표했던 글을 간추린 것으로 첫 번 째로 벌교이야기이다. 현재 벌교는 보성군에 속한 ‘읍’으로 행정 구역상 가장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소설 ‘태백산맥’에
순천 수해지구 복구와 관련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문사위원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변경하더라도 순천 수해지구 복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항구적인 수해 대책을 위해 제방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62년 8월 30일 박정희 의장은 과거보다 나은 순천시로 건설할 것을 건설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순천 수해지구 현장을 들러서
1963년 8월 28일. 경향신문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 손실을 안긴 1년 전의 ‘순천 수해’ 한 돌을 맞아, 동천 옆에 세워져 제막식을 기다리는 위령탑에서 수해에 얽힌 통곡의 이야기를 보도하였다. 8명의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김○○기자, 남의 목숨을 구하려다 순직한 강○○ 순경의 부인 조○○여사, 물에 떠내려간 어린 넋을 달래며 애를 두고 나왔다고 1년간
1930년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부설한 경전선의 전신인 광여선(광주-여수)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어서 1936년에는 경전북부선이 전체 구간을 개통하면서 그 명칭을 전라선으로 바꾸었다. 광여선이 전체구간 공사를 동시 다발적으로 추진한 것과 달리 전라선은 호남선 철도의 지선으로 1913년 전북철도주식회사가 허가를 받아 1914년부터 운영하던 철도에서 연차적으로
1980년대 이후 자가용의 급속한 증가와 고속버스의 운행은 철도 관련 조직의 대대적인 편제 변화를 가져올 만큼 철도 교통 발달에 있어서 높고 험한 장벽이었다. 최근에는 선로의 복선화와 전철화로 일제 강점기 이후 순천을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설정케 했던 경전선은 농업에 의존하는 읍․면지역의 기반이 침체된 것처럼 깊은 나락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
건축은 그 시대의 상황과 기술이 반영된 문화적 자취이다. 그 가운데 특히 주택은 지역의 생활이 그대로 비춰진 문화체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이 투영된 주거건축을 살펴보는 것은 그 시대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근대기 순천의 건축문화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아케노를 필두로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일본식 주택일 것이다. 그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일본인 건축기술자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조선건축회’의 기관지인 ‘朝鮮と建築’을 보면 순천의 상하수도 역사를 알 수 있다. 1932년 순천읍에 심상소학교가 준공되고, 새로 놓인 성동교의 입찰 소식과 함께 순천에 수도공사가 시작되고, 하수도 시설공사가 예정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1933년 10월 21일에는 상수도 통수와 이를 기념하는 축하
‘순천도립병원’은 현재의 ‘전라남도 순천의료원’을 일컫는 이름이다. 순천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약칭인 ‘의료원’보다 ‘도립병원’이라는 호칭이 오히려 의사소통에 편리할 때가 있다. 지금의 순천의료원은 1937년 순천철도사무소 조직 내에 철도병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유일한 관립병원으로 1922년 개원한 ‘순천자혜의원’이 모태이다. 순천에 자혜의원(慈
조선 후기까지 대장간은 지방도시의 제조나 제작을 상징하는 곳이었지만 읍성도시에서 근대 도시로 전환되면서 등장한 것이 공장이다. 순천읍성에서 대장간을 중심으로 하던 농경 중심의 산업 구조는 1920년대에 들어서 변화를 보인다. 1920년대 초반에는 일선산업, 삼곡정미소, 정종문정미소 등 정미소가 대부분이었고, 1920년대 중반에는 순천인쇄소와 후등승행당인쇄소
근대기 지방 도시사회의 큰 변화 중의 하나가 공연예술이었고, 그 변화의 한 축은 영화였다. 건축에 있어서도 일제강점기 대중 공연문화의 변화의 계기는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전천후 공간을 제공한 극장의 역할이었다. 순천 최초의 극장은 1937년 7월에 완공되어 몇 해 전에 70여 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철거된 국도극장의 전신 ‘순천극장’이다. 일
근대기 도시사회에서 기생이라고 하면 일본이 한반도로 끌어들인 유곽(공창)을 떠올릴 수 있다. 1900년 전․후 순천은 인접도시 여수와 달리 일본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항구도 없었고 당시의 일본인 유동 인구를 끌어들일 요인이 많지 않아 유곽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 순천에 유곽이 자리했던 곳은 옛 동방여객 정류장 일대로 읍성 상권의 중심축이었다.
일제강점기 순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약 100년 전 순천을 여행한 타자(他者)의 경험을 통해 그 시절 순천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193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인 운정생 (雲汀生)은 1922년 9월, 경성을 출발해서 순천을 지나 고흥으로 향하는 여정을 동아일보에 실었다. 그 글에 의하면 그는 은선같이 비가 내리는 경성을 떠나기 위해 여행용 행낭
우리가 5일장 또는 전통시장이라고 부르는 장을 조선시대에는 ‘장시’라고 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은 ‘지리지 이야기’에서 장시는 당시 한성의 시전과 대비되는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7세기와 18세기까지 장시는 주로 읍치를 중심으로 개설되다가 벌교포와 같이 조세 운송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포구를 중심으로 멀리 떨어진 지방과의 유통으로 발달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가속화된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평야지대인 순천읍성과 동천 사이로 주거지가 확대되었다. 여기에 순천읍성 동문에서 현재의 ‘선미중앙하이츠아파트’ 옆 동천을 횡단하는 전주-여수 간 국도 개설과 일본인 교육기관인 순천심상소학교가 현재의 성동초등학교 자리로 이전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더욱 활기를 띄었다. 하지만 저지대라는 지형적 약점은 도시 발전의
동천(東川) 이란 이름을 가진 하천이 순천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천의 동천처럼 도심의 중심축으로 흐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순천의 도시지역이 꾸준히 확장되면서 순천의 동천은 도시 발전의 기준 축으로 자리메김해 왔다. 조선시대와 그 이전에는 도시의 확장된 경역으로 존재 했던 때문인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도로와 철도가 동천을 관통했지만 도심은 동천
남초등학교는 순천에서 처음으로 근대교육이 시작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기록을 보면 순천남초등학교는 1910년 사립 보조 지정학교로 지정되고, 1911년 공립보통학교로 설립되었다. 그렇지만 남초등학교의 자체 기록에는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운영된 것은 이미 그보다 훨씬 앞선 1906년 사립승명학교로 되어 있다. 이처럼 기록이 다른 이유는 당시 일본이 근대
전남 동부지역 선교 거점으로 처음부터 순천이 낙점된 것은 아니었다. 순천읍성에 개신교가 자리잡는 과정에 인접 보성군의 근대적 도시공간인 벌교가 함께 거론되었다. 벌교는 1900년대 초반까지 주요 교통로였던 해상교통이 편리하고, 상권의 거점이라는 점이 부각된 경우였고, 순천은 지역의 전통적인 중심 도시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선교사들이 순천의 도시발
‘애양원’은 현재 행정구역상 여수시 율촌면이다. 애양원을 부를 때 대개 ‘애양원’이라고 부르기 보다 ‘여수’라는 행정구역을 붙여 지금의 병원이름인 ‘여수애양병원’ 또는 ‘여수애양원’이라 부른다. 하지만 애양원은 지금의 여수애양병원처럼 단순히 병원으로 한정된 공간이 아니었다. 여수시 율촌면의 ‘애양마을’을 함께 부른 이름이었다. 애양원은 1911년 현 광주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