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창수 상사의 등장 3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1967년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1:해방 건군』에서 지창수를 ‘반란’의 지휘자로 규정했는데, 향토사학자 김계유의 증언과 글도 ‘반란’의 지휘자로 지창수를 언급했다.

김계유는 “연대 선임하사관인 지창수 특무상사가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였다.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고 등 제14연대의 봉기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하지만 김계유는 당시 14연대 군인이 아니었다. 또 그가 기록한 제14연대 내 사정도 친구 후배에게 들었으며, 친구 후배는 또 다른 친구에게 들었다. 즉, 몇 단계 건너 들었던 이야기를 직접 경험한 것처럼 증언하고 기록한 것이다. 김계유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구술사 사업과정에 선휘성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고로 선휘성은 순천에서 여순사건 진실규명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한 교사이다.

면담자 : 여순사건 주동 세력은 누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구술자 : 보통 일반인들이 알기로는 김지회로 아는데, 사실은 지창수 상사 아닙니까?
면담자 : 확언할 수 있는 증거는 있습니까?
구술자 : 증거야 없죠. 증거야 없지마는 지역이나 향토사에 관심있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천하공지의 사실입니다.

김계유는 지창수가 주동자라고 확언하였지만, 증거는 없다. 필자는 여순사건을 조사 또는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 지역의 어르신들에게 “여순사건의 주모자가 누구라고 들었느냐”는 질문을 자주 한다.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김지회’이다. 90% 이상이다.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계유는 거의 확언하는 수준으로 ‘지창수’를 지목하였다.

김계유는 1985년부터 『여수․여천 발전사』를 집필하기 위해 여수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빨리『한국전쟁사1:해방과 건군』을 습득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으로 지창수를 인민해방군 사령관으로 묘사한 것과 부대 내에서 지창수가 선동하며 연설했다는 내용은 『한국전쟁사1:해방과 건군』에 처음 등장한 기록이다.

1988년에 발행된 『여수여천발전사』에는 10월 20일 중앙동 로터리에서 진행된 인민대회를 직접 목격했다면서 “500명이 집결했으며, 이용기가 군 인민위원장, 김수평이 보안서장으로 호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일 보안서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김수평이 아니고 유목윤이었다. 김계유는 1991년 『역사비평』에 「1948년 여수봉기」란 글을 남겼다. 이 글에는 20일 인민대회에서의 지창수 연설 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다. 지창수가 인민대회에 참석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고, 당시 마이크 사정으로 연설 내용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참석자 대부분의 증언이었다.

김계유의 주장은 1967년 『한국전쟁사1:해방과 건군』이전에는 볼 수 없는 기록이다. 그런데도 김계유는 당시 부대상황을 마치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기록으로 남겼고, 이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반군이 10월 20일 순천으로 진격할 때 지창수는 여수에 남아 지휘하였으며, 10월 24일 송호성 사령관이 이끈 진압부대를 여수 잉구부에서 패퇴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0월 25~27일 사이에 여수 묘도를 거쳐 광양 백운산으로 입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여수 보안서장이었던 유목윤도 같이 입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운산에서는 여수 제14연대 군인을 중심으로 여수 백운산부대(일명 유목윤 부대)가 창설되었다. 이때 사령관이 유목윤이다. 봉기를 지휘하고, 인민해방군까지 역임한 군인인 지창수가 아닌 민간인 유목윤이 부대를 창설하였으며 사령관을 맡은 것이다.

지창수를 주도인물로 규정했지만, 사건 발발 이후 10월 24일부터의 행방․행적은 묘연하다. 그는 개인 신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난무하다. 진압과정에 지리산 또는 보성에서 사살되었다는 설도 있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 6․25전쟁 때 총살되었다는 설, 그리고 집이 부유하여 풀려났다는 설도 있다. 지창수의 행적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정운창의 증언이다.

여순사건 후에 지창수와 보름정도 구례 문척면에서 함께 생활했다. 지창수가 지리산 칠불암에서 잠자다가 진압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지창수가 광주의 부잣집 아들이었으며 친척 중에서 경찰 간부나 고위 군인이 많아서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으로 감해졌으며 그 후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지창수를 확인하러 안기부 직원과 함께 서울에 갔으나 동명이인이었다.

지창수가 광주 출신인 것은 사실이고, 그의 형(지홍수)이 전남 도경에서 경찰을 역임했다는 증언이 있다. 하지만 광주 부잣집 아들은 아니라고 한다. 충주(忠州) 지(池)씨 대동보에서 지창수를 확인하고자 했으나, 아직 가계(家系)를 찾지 못했다.

정운창이 증언을 할 당시(2002년 3월 31일)까지도 안기부 직원이 찾아와 서울 동행을 요청하며 지창수의 확인 여부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나 국방부에서도 지창수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를 혼란으로 빠뜨리고 ‘반란’을 일으킨 주도인물을 5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도 찾고 있다는 것은 당시에 핵심적 인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정부의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후에 밝혀진 바로는 지창수는 여순사건 발발 당시 결혼을 하였고, 자식이 하나 있었다. 당시 서정(현, 여수시 서교동)에서 살고 있었으며, 국군이 진압한 이후에 지창수의 부친이 지창수가 살았던 집에 직접 찾아왔었다고 한다. 지창수의 부인은 재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국방부에서는 왜 1967년에 갑작스럽게 지창수를 여순사건 주모자로 등장시켰을까? 지창수가 여순사건 주모자로 굳어지면서 지역사회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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