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 신월리에 주둔 중이던 국군 제14연대에서 발발했다. 여순사건의 직접적 발발 배경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제14연대에 1개 대대의 출병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제14연대 일부 군인은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를 요구하며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봉기’란 단어가 거북스럽다
그동안 전남 동부지역의 지방지인 시·군지(사)를 통해 각 지역이 여순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나의 사건이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인식을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순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지역주민의 관심과 노력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전남 동부의 6개 시·군을 분류하면 사건의 중심지는 여수와 순천이다. 그리고 반군이 입산하면서 지속
전남 동부지역에서 고흥은 여순사건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특별한 기억의 근원이 무엇일까? 당시 고흥은 여순사건이 발발한 여수와 해로(海路)를 통해 왕래가 잦았던 지역이다. 한 때 여수 인구의 1/3이 고흥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여순사건에 대한 고흥지역의 특별한 기억에는 1978년에 발간한『고흥군 향토반공사』와 1986년에 발간한『고흥군 반공사
보성군은 조정 공간적 배경이 된 지역이다. 한 편의 소설로 조그만 남도 포구였던 벌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여행지로 재탄생했다. 벌교에는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다.『태백산맥』의 전체적 큰 주제였던 1948년 10월 19일 사건에 대해 ‘여순반란사건’이란 명칭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왜, 그러한 이름을 붙였을까 궁금해진다.보성에서는 1954년『보
구례군은 지리산을 품고 있다. 지리산에는 1950년대 중반까지도 국군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그 때문에 구례사람의 고통과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가 지리산 곳곳에 숨겨져 있다. 큰 산 아래 살았다는 이유로…고통과 피해가 컸던 만큼 이야기를 꺼내기도 쉽지 않았다. 구례에서 처음으로 여순사건을 거론한 지방지는 1987년에 편찬한
광양은 백운산을 끼고 있다. 그 때문에 여순사건으로 인한 정신적․물질적 피해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도 여수와 순천에 비하여 여순사건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없고, 논의도 활발하지 못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랜 시달림에 대한 피해의식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광양에서는 1983년 편찬했다. 이 책에서는
여순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던 여수지역에서 지방지가 다시 발간된 것은 1982년이다. 여수ㆍ여천 향토지 편찬위원회에서 『여수ㆍ여천향토지』를 발간했다. 이 책에서는 ‘여순반란’이라고 불렀다. 필자가 소산상회, 백두회관, 화신백화점 등을 표기한 것으로 보아 여수지역의 정세를 잘 아는 향토사학자로 짐작이 된다. 이 책에는 반군의 여수점령 과정과 점령 이후의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제14연대가 주둔했던 여수지역에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여수에서 여순사건을 최초로 언급한 책은 1952년 여수교육청에서 발간한 『여수향토사』이다. 집필자는 김낙원(金洛原)이다. 『여수향토사』에서는 ‘여순반란사건’ 또는 ‘무자십월사변(戊子十月事變)’이라고 했다. 김낙원은 ‘여순반란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나름 정당하지 않은 명칭
순천에 구구절절 내려오는 오경심의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당시 여러 신문에는 오경심에 대한 재판기록이 남아 있다.호남방면 반란군에 관련된 지방민 폭도에 대한 제1차 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 판결이 지난 12일 정오 계엄지구 법무처 제2호로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무기 징역(사형에서 감형된 9명) : 丁三台 宋淳弘 朴萬古 徐東葉 金錫基 林奉祚 崔永完 朱
여순사건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에서는 여수와 순천 주민을 ‘반란’의 주체로 지목했다. 여수와 순천은 여순사건의 중심지이다. 여순사건 당시 여수는 7일 동안 반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순천은 3일 동안이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인명 피해(사망자)는 여수 1200여 명, 순천 1134명이다. 이 피해가 정확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짧은 점령기간 임에도
‘여순사건’이란 명칭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순사건’이란 명칭을 쓰고 있지만,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여순반란사건’ 또는 ‘반란사건’이라고 한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사람의 입에서는 그냥 쉽게 반란사건이라고 부른다. 내포된 의미도 있지만, 그동안 들어왔던 말에 익숙한 탓도 있다. 여순사건이 발발한 뒤 정부의 첫 발표는 10월 21일에 있었다. 당시 이범석
독일의 역사철학자이며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저서에서 “모든 역사는 지배자의 역사이며, 그 역사는 왼손으로 다시 써져야 한다”고 했다. 신채호 선생의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2014년과 2015년, 대한민국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민낯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