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창수 상사의 등장 2
제14연대의 1개 대대가 마침 제주도에 증원부대로 출동하게 된 기밀을 탐지한 지하남로당에서는 동 연대의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에게 출동하기 직전의 기회를 포착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지령하였고… 동 연대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가 주동이 되어 출동직전에 반란 쿠데타는 차질없이 계획대로 성공하였다. 20:00시경 연대인사계 지상사는 대내 핵심세포 40여명에게 사전 계획대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케 하고 비상나팔을 불게 하였다. 출동부대는 지체없이 연병장에 집결하였다. 연대병력을 반란으로 조성시키는데 성공한 지상사는 자신이 해방군의 연대장임을 선언하고 여기서 그들이 계획한 대로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등의 반군지휘체계를 편성하였다.
남로당에서는 제주도 출병을 탐지하고 연대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에게 지령을 내렸고, 지창수와 김지회, 홍순석이 주동이 되어 출동 직전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지창수가 해방군 연대장을 선언했다는 것은 자신이 ‘반란’을 총지휘했으며, 이후에도 주도적으로 부대를 이끌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건이 발발한 지 19년 만에 ‘반란’의 지휘자가 지창수 상사로 바뀐 것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이 책은 국방부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국방부에서는 어떠한 근거로 지창수를 주도인물로 지목하게 되었을까. 이 책에서는 지창수를 해방군 연대장으로 서술하였지만, 그에 대한 신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책이 발행된 이후 지창수 상사는 여순사건을 일으킨 총지휘자로 확고하게 자리하였다. 김지회를 비롯한 장교그룹을 총사령관, 수괴 등으로 발표했던 기존 결과와 다른 기록이다.
여순사건의 진압작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미군의 기록은 어떠할까.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고문 역할을 하였던 주한 미군 사령관 쿨터 소장은 1948년 10월 23일 공보처를 통하여 성명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폭동은 10월 19일~20일간 야반에 남한 남안(南岸) 여수에서 제주도 임지로 향하여 승선을 대기 중이던 경비대원 40명이 임명되지 않은 장교 지휘 하에 반란을 야기한데서 시작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임명되지 않은 장교란 계급상으로 장교가 아닌 하사관이나 사병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주 4․3사건 진압작전에 출동할 부대가 아닌 다른 부대의 장교를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48년 11월 10일 자 미군 제24군단 작전보고서(G-3 Section, XX Ⅳ Corps:1948.11.10.)의 내용을 보면,
1948년 10월 19일 19:00부터 24:00사이 여수를 향한 군대 집결지인 앤더슨 기지에서 지창수 특무상사가 지도하는 전라남도 여수에 있는 제5여단 14연대 7명의 한국 군인들은 다수의 경비대원들에게 전 연대를 통제하는데 참여하라고 연설하기 시작하였다. … 이런 움직임은 반란의 최고지휘자로 알려진 김지회 중위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지창수 특무상사를 중심으로 7명의 군인이 ‘반란’에 참여하라는 선동 연설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반란’의 최고 지휘자는 김지회 중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지창수 역할은 부대원을 선동 또는 참여시키는 그룹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군 작전보고서는 앞서 살펴본『동광신문』1948년 11월 5일 자의 모 대위를 발언의 ‘최선두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비상대책회의에서부터 작전수립과 진압하는 과정 등 미군은 군사고문관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진압 이후에도 좌익혐의자 조사와 숙군 과정에도 깊이 개입하였다. 미군에서는 사건을 진압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총지휘자를 파악했을 것이며, 총지휘자로 김지회를 지목한 보고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