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창수 상사의 등장1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여순사건 피해자 실태조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여수와 순천 외곽지역(옛 승주군)의 ‘피해실태조사 자료집’을 1998년과 2000년에 각각 발간했다. 민간단체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헌신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이때 필자도 조금 거들었다. 현지 피해조사의 어려운 점은 “다 지난 일을 왜 다시 들춰내느냐?”는 핀잔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시선의 눈빛이었다.

그래도 긴 과거의 시간을 되돌려 낯선 이에게 당시를 전해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씨줄 날줄처럼 얽혀있는 가슴 깊숙한 이야기에는 회한의 눈빛이 역력했다. 도중에 말을 잇지 못하고 치떠는 처절한 몸짓은 듣는 이에게도 몹시 힘든 시간이었고,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그렇게 시작하여 전남 동부지역 곳곳을 다니면서 여순사건과 관련된 증언 또는 구술을 모았다. 그리고 지금 여순사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현장에서 어르신들과 여순사건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반란사건’, ‘산사람’, ‘군경’이다. ‘반란사건’은 여순사건을 지칭한 고난의 시작을 의미한다. ‘산사람’은 밤이면 나타나 식량이고 옷 등을 약탈한 사람들이다. ‘군경’은 무엇일까.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군경은 분명 주민들에게 환영받는 사람들로 기억되어야 했다. 그러나 환영보다는 그들의 가혹한 행동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저지른 학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여순사건을 좀 더 기억하는 어르신들 입에서는 ‘여수14연대’와 ‘지창수’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예컨대 “긍께 여수 14연대에 특무상사 지창수가 반란을 일으켜 순천까지 옴시롱…” 등의 말이다. ‘지창수’가 누구인데 보성․고흥․구례 등 산골의 촌부까지도 여태껏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이름뿐만 아니라 계급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시골의 노인뿐만 아니라, 여순사건을 기록한 많은 문헌에서도 지창수란 이름이 언급된다. 『여수시사』에는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지창수를 중심으로 하는 하사관 그룹이었다. <중략> 지창수는 먼저 예광탄 3발을 신호로 반란을 시작하기로 하고, 예광탄이 오르면 즉시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기로 했다”『순천시사』에는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반란주도 하사관 그룹들은 지창수의 인사계사무실에 모여 최종적으로 반란논의를 하고 있었고, 여기서 지창수는 이미 계획해둔 상황을 알려주었다” 등으로 기록했다.

앞서 연재하였지만, 이미 정부는 오동기와 송욱을 여순사건 총지휘자 등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인사계 특무상사 지창수를 주범 또는 주동자로 기억하거나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된 연유일까. 여순사건의 주동자 지창수를 찾아 떠나보기로 하자.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에서는 『여순사건 신문자료집』을 올해(2015년) 10월까지 발간할 예정이다. 이번 신문자료집은 1948년 10월~1949년 12월까지 중앙지(경향신문․동아일보․자유신문 등)와 지방지(대동신문․동광신문․호남신문 등)에서 보도한 여순사건 관련 기사 대부분을 해제한 것이다. 중앙지와 지방지 각각 2권씩 모두 4권으로 여순사건을 연구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뜬금없이『여순사건 신문자료집』을 소개한 것은, 여순사건이 발발한 1948년 10월 19일부터 1949년 12월 31일까지 보도된 기사를 분석하면 14연대 군인으로서 반군에 가담한 인물 15명을 모두 찾을 수 있다. 장교 3명(김지회․홍순석․이기종)과 하사관과 병사 12명(지창수․윤홍규․최효래․김동진․김하원․채희홍․김정룡․박현인․김정남․이한국․유한식․최경채)이다.

이 중에서 신문 보도에 핵심을 이룬 인물은 김지회이다. 김지회란 이름은 수없이 등장하여 몇 회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홍순석이 8~9회 정도 언급되고, 이기종은 두 차례만 언급된다. 하사관과 병사 그룹에 속한 12명은 단 한 차례씩만 보도된다. 앞선 명단 중에서 김하원 이하는 국군의 귀순공작에 자수한 인물이다. 여순사건의 주범 또는 주동자로 널리 알려진 지창수도 단 한 차례만 신문에 언급된다. 지창수를 처음 보도한 신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麗水事件發端 指揮者 池昌洙
모 대위의 말에 의하면 지난 19일 심야에 여수14연대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최선두에서 사병을 독려하고 병기고 등의 파괴를 선동한 자는 바로 대위 자신이 광주 4연대에 재임시에 부하로 있었든 지창수(池昌洙)라는 애라고 한데 그의 연령은 23세 계급은 특무상사(特務上士)이며 지극히 온순하고 때로는 감격하기 쉬운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다.<『동광신문』1948년 11월 5일>

당시는 정부와 국방부에서 언론 검열제를 시행하고 있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는 것은 누누이 밝혔다. 이날 신문은 정부나 국방부의 정식적인 발표가 아니었다.『동광신문』기자가 취재 중 모 대위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모 대위는 제5여단 소속의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제5여단은 호남지구전투사령부 남부지구(광주 주둔)의 진압부대로써 김백일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모 대위의 말에 따르면 지창수는 19일 반란 당시 최선두에서 사병을 독려하고 병기고 등을 파괴 선동했다는 것이다. 모 대위는 지창수를 최선두에 섰던 인물로 표현했지 지휘자 또는 주동자라고 하지는 않았다. 또한, 이날 취재를 통해 지창수에 대한 몇 가지 신상을 확인할 수 있다. 지창수는 광주 4연대에서 근무했으며 나이는 23세, 계급은 특무상사라는 것이다. 성격은 지극히 온순하면서 단순하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다.

1948년 10월에서 1949년 12월까지 김지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언론에 노출되었다. 반면에 지창수는『동광신문』1948년 11월 5일 자에 단 한 차례만 보도되었다. 언론에 노출이란 국방부 발표를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국방부가 두 차례씩이나 김지회에게 현상금을 걸었던 것에서, 그를 잡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창수는 어떻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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