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광복 70주년이다. 어느 때보다 친일 청산에 대해 많이 회자됐다. 하지만 논의만 빈번할 뿐, 친일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친일 청산의 핵심은 친일파 척결이다. 즉, 사람의 과오에 대한 정확한 책임을 묻는 것이 요체이다. 용어에서도 친일파라고 하는 것이 합당한지 의문이다. 오히려 민족반역자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광주전남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은 모두 155명이다. 이 중에 전남동부지역 시・군 출신이 명확하게 기록된 인물은 15명이다. 이는 전남동부지역 출신으로 친일파가 15명만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군이 기록되지 않아 지역을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 50명이나 된 점을 미루어 보아 늘어날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15명 중 순천과 여수가 각각 6명이며, 보성이 3명이다.

이 명단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명단이다. 그리고 이 글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내용을 참조했다.

순천 출신 중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을 살펴보자. 박병운(朴秉芸, 高木春光)은 1888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02년 순천 선암사에 최영담을 스승으로 출가했다. 광주 증심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1937년 1월 선암사 주지로 취임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7월과 8월 두 차례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 법요식을 열었다. 참여 인원은 승려 59명을 포함하여 관리와 신도 등 130명이었다. 이때 본산에서 10원, 말사에서 90원을 합쳐 100원의 국방 성금을 헌납했다. 이후 참전 군인과 유가족을 위한 위문금, 일본군 위문을 위해 조직된 북지황군위문단 경비 등을 계속 모금하여 1938년 4월까지 선암사 본·말사가 중일 전쟁을 위해 헌납한 금액은 모두 451원 79전이다. 1939년 중일전쟁 2주년 기념일에는 일본군 위문금 187원 14전을 선암사 주지 명의로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 보냈다. 1943년 봄까지 선암사 주지를 지냈다.

성정수(成禎洙, 成田禎洙)는 1899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10년 메이지(明治) 대학 법과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했다. 그해 7월에 경상남도 경무부 소속인 하동경찰서에 통역생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1914년 경부로 승진했으며, 1919년 8월부터 전라남도 제3부 경부를 지냈다. 1921년 8월 전라남도 강진군수에 임용되어, 진도군수, 보성군수, 평안북도 창성군수 등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에 쇼와(昭和) 일왕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세 차례 전라남도 도회의원(순천)을 지냈다. 1938년 승주금융조합본소 조합장을 맡았으며, 1941년 9월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조선임전보국단의 전라남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악질 고등계형사’로 반민특위가 체포되어 3년간 공민권 정지 판결이 내려졌다.

임학수(林學洙)는 1911년 순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악이(林岳伊)이지만 족보에는 임영택(林榮澤)이며, 다른 이름은 임내홍(林乃洪)이다. 1936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사상전(思想戰)을 위해 동원된 이른바 ‘펜부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9년 10월 ‘문필보국’을 표방한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9년 황군위문작가단을 발의하는 등 침략전쟁의 위문에 참가하는 친일 시와 글을 발표했다. 1943년 11월 8일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총진군」의 일부를 소개하면,

“친애하는 아우들이여,
자, 펜을 놋코 뛰여나오라 
마침내 비상경보는 울렷다. 종소리 요란히 들린다.
학도총진군!
눈은 샛별가티 그 동작 날새기 포범가티
어깨에 총, 허리에 칼
몬지 자욱히 대지를 박차는 군화 소리에
아, 오랫동안 메말라 질식해
잠든 강산이 다시 소스라처 깨련다 
친애하는 아우들이여.”

임학수는 학도지원병 응모를 격정적으로 선동했으며, 일본군의 자살공격을 찬양하는 글과 시를 다수 남겼다.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순천출신 임학수. 그는 1943년 11월 8일 ‘매일신보’에 학도지원병 응모를 선동하는 글‘학도총진군’을 기고했다

오동환(吳東煥)은 1910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32년 전라남도 장흥경찰서 순사를 시작으로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순사로 활동했다. 해방 후 전남 함평경찰서장 대리, 여수경찰서 부서장, 무안경찰서 영산포 지서 주임 등을 역임했다. 1949년 여수경찰서 총무주임으로 근무했다.

윤형남(尹亨南, 平野亨南)은 1911년 순천에서 태어났다.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를 졸업 후 1940년 10월 일본 니혼(日本)대학 법학과에서 수학했다. 그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1941년 강원도 내무부 지방과에서 근무하다 1943년 9월 군수로 승진해 경상북도 칠곡군수에 임명되어 해방 때까지 재직했다.

1948년 11월 서기관으로 외무부 조약국 법무과장을 지냈고, 1951년 서울에서 변호사 등록을 했다. 1954년 순천에서 무소속으로 민의원, 1958년 민주당 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 1960년 신민당 소속으로 제5대 민의원에 당선했다.

임석진(林錫珍, 林原吉)은 1892년 전남 승주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기산(綺山)이다. 1905년에 송광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했다. 1928년에 3월 송광사 감무로 재직하면서 ‘내지사찰단’으로 23일간 일본을 다녀왔다. 조선총독부가 후원하는 일본 시찰단 파견은 조선 승려 회유책의 일환이었으며, 시찰에 참가한 승려들은 친일 행보를 보였다. 1932년에 대본산 송광사 주지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1935년과 1936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추진하는 심전개발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송광사는 인근 농촌 지역에서 심전개발 순회강연을 벌였다. 이때 임석진도 직접 「심전개발에 대하야」 등의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2년 4월 ‘불교’신25집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글에 일제가 도발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일본군의 승리를 축하한 후, 국가에 목숨을 바친 영령을 애도하고 노고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조선의 불교도는 최고의 불교정신을 발휘해 일본이 승리하도록 최대한의 능률을 발휘하는 것이 임무라고 강조했다. 1942년 6월에 불교계에서 두 번째로 군용기 대금 모금을 결의하여, 1944년 비행기 구입금 2507원을 총본산인 태고사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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