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월이 하도 수상하고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가슴 속에 맺힌 울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다. 얼핏 보면 그 대상이 명확한 것 같지만 사회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자학까지 생각하면 대상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헝클어져버린 세상과 그런 세상을 주도하는 사람에 대해 슬픔과 연민이라면 모르겠지만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세상을 진정으로
김장철이 되었다. 보통의 농부들은 벼를 수확해서 방아를 찧고 김장을 하고 나면 봄이 올 때까지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기지만 김장용 배추를 절여서 판매하는 우리 집에서는 일 년 중 가장 바쁜 철이다. 밭에서 배추를 뽑아 와야 하고 오후에는 절여진 배추의 무게를 달아 포장해서 시간에 늦지 않게 택배로 부치거나 시내의 소비자들에게 배달해 줘야 하기 때문
귀농해서 우리 가족은 낙안에 거처를 마련하고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외서의 일터로 7년 동안 출퇴근을 하면서 일을 했다. 그것은 농사꾼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었다. 우선은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 일을 할 수 없었다. 특히 해가 일찍 뜨고 한낮에 일을 하기 어려운 여름철에는 아침 시간이 깨알같이 소중한 시간인데 그 시간에 일을 할 수
나는 그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품질 인증을 세 번 받았다. 감자로 두 번, 배추로 한 번. 초창기에 지역에 친환경 쌀 작목반이 구성되어 무농약 인증을 추진했는데, 진행되는 과정이 엉터리여서 이렇게 인증을 받아서는 농민들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라 생각되어 ‘바보’ 소리를 들으며 그만두었고, 유정란의 무항생제 인증은 사료의 항생제 잔류 검사를 위해 20여
농업과 농민에 대한 행정의 지원은 편의상 포괄적 지원과 선별적(선택적) 지원으로 나눠볼 수 있다. 포괄적 지원은 일정한 조건에 해당되는 농민 모두를 지원하는 것이다. 농업인이면 국민연금 불입액의 일정액을 지원받는다. 건강보험료는 농촌에 거주하기만 하면 일정 비율이 지원되고 여기에 농지원부를 가진 농업인에게 추가로 지원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농사꾼으로서 완벽하게 노후를 보장받지 않았거나 생태적 근본주의자로 살지 않겠다면 얼마간의 농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는 농사의 목적이 자급자족인가 아니면 상업적 농업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직결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실상 어리석은 질문이다. 오늘날 공교육, 자동차, ‘현대적’ 의료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자급을 위한 삶이 거의 불가능
나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역할은 부모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아이들이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돌보고, 부모 스스로 삶에서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며, 아이들이 진리 속에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늘 생각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신이 원하는 대로, 혹은 그를 점지해준 삼신할미가 이끄는 대로, 아니면 그에게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기 전 집에서 생활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가장 아쉬운 것 중 하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농사일을 되도록 많이 경험할 수 있게 배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농장 가까이에 집을 짓기 전까지 7년 동안 집과 일터가 떨어져 있었던 사정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일터로 오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그게 평일에는
우리 가족이 귀농하던 때에 큰 아이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딸인 작은아이는 유치원을 1년 다니다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제 부모를 따라 나서야 했다. 우리가 낙안에 거처를 마련함에 따라 이 녀석들은 낙안초등학교 5학년과 병설유치원으로 들어갔다. 일터와 집이 시오리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간 녀석들은 오후에 집에 돌아
오늘날 친환경이라는 말 만큼 잘못 쓰이고 있는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친환경 농업은 말 그대로 환경에 친화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고 친환경농산물은 그러한 방식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말한다. 그리고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농산물은 당연한 결과로서 사람이 먹기에 안전하고 건강한 식재료가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말이다.그런데 생산자나 소비자를 막
둘째는 해충을 구제하는 문제다. 작물에 해를 끼치는 벌레들은 작물의 종류와 생육 시기에 따라 각각 다르다. 우선 벼는 생육 초기에 벼물바구미라는 것이 애를 먹인다. 볏잎을 갉아먹는 이것들을 방치하면 나중에 뿌리 근처로 내려가 벼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한다. 귀농 이듬해에 벼농사에서 어느 논의 한쪽에 이 벌레가 극성해서 벼가 잘 자라지 못하고 인접한 이웃
현대 문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서 귀농하는 사람 치고 친환경농업을 실천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고려하는 차원의 사회적인 의미도 있지만 우선은 내 가족부터 안전하고 깨끗한 먹거리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연금 등으로 안정된 노후를 보장받고 귀농·귀촌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귀농 이듬해부터 시작한 닭 농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귀농해서 4,5년 만에 내 나름의 영농체계가 마련되었다. 봄가을로 병아리를 400마리씩 들여 알 낳는 큰 닭 1,000여 수에 부모님이 짓던 농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처갓집 논밭을 합쳐 5,000여 평의 땅으로 내 농사를 꾸리게 된 것이다. 농사에 대해 내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두 가지 상품작물 또
귀농한 이듬해 봄에 처갓집 땅 중에서 닭을 치기에 알맞은 곳을 골라 축사를 지었다. 자연농업협회의 축사 건축 팀에게 공사를 맡겼다. 물론 건축의 기초공사와 산란상자, 먹이통, 횃대 등과 같은 내부 시설들은 서툰 솜씨로 내가 다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측간 목수 쯤 되지 않을까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자연농업협회와는 귀농 첫해에 인연을 맺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게 되니 좋은 점이 꽤 많았다. 우선 농지를 구하는 문제로 고민해야 할 일이 없었다. 첫해에 농사를 많이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해 부모님이 지으시던 넓지 않은 땅을 물려받아 농사를 시작했지만, 이듬해에 농사를 늘리려고 하니 동네에 살고 있는 일가분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땅을 선뜻 내주었다. 또 양계장을 지을 땅도 고향 마을에서 10
2001년 봄에 고향 마을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낙안에 집을 얻어 이사를 하고 고향 마을로 출퇴근을 하게 됐다. 도시 생활의 흔적을 버리지 못한 많은 짐들을 고향집 오두막은 감당할 수 없어 새로 지은 빌라를 얻었다. 고향 마을에는 부모님이 평생 짓다가 늙으신 후 남에게 내준 논밭 1,500평이 있었다. 첫해에 이 땅에 벼와 고추, 감자와 그 후기작으
귀농을 결심한 이들에게 정착할 곳을 결정하는 일은 맨 처음 부딪치는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귀농한 10여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귀농인들은 수도권과 가깝고 농지가 많은 충청도로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귀농이 도시의 삶을 벗어나려는 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라는 특별한 곳이 갖는 구심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서울의 귀농학교에 강의를 하러 오신 분 중에는 벼 유기재배로 유명한 분이 계셨다. 기골이 장대하고 불그레한 얼굴에 수염이 길고 목소리는 걸걸해 호걸형이었다. 그분은 1만평이 넘는 논에 오래 전부터 벼농사를 유기재배로 해 오셨다고 한다. 농사에서도 영성(靈性)과 우주의 기운을 중시하며 직접 벼의 육종도 해서 생산한 쌀 중에는 80kg에 당시 가격으로 80만원
귀농을 고려하며 우리 집에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귀농을 하려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하라고 부인이 말한다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아내의 손에 이끌려 귀농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미녀와 결혼하게 된 사람더러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농담도 하는데, 이런 남자들이야말로 그런 말을 들어야 될 것 같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사일에 따르는
한겨레문화센터의 강좌가 끝난 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주관하는 서울귀농학교에 등록해서 석 달 과정의 강좌를 들으면서 주말에 시간이 나면 강화도의 아는 분 집에 가서 농사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전국귀농운동본부는 당시에 창립 초기로 서울과 지방 대여섯 곳에 귀농학교가 있었고 유명한 농부와 교수 등이 강사로 나와 교육을 진행했다. 한겨레와 비슷하게 농사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