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회 중위는 누구인가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오동기, 송욱, 지창수’. 여순사건 주모자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반란’을 주도했다고 하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정황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창수’는 ‘반란’의 총 지휘자로 굳어져 있다. 또, 오동기와 송욱도 보수단체에서 펴낸 기록물이나 국군・경찰의 공간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언제쯤 왜곡된 사실이 바로 잡힐 수 있을까.

진압작전이 한창이던 10월 25일에 전투사령관 제5여단 김백일(金白一) 중령은 순천에서 전투경과를 ‘현지시찰 재광기자단’에게 발표하였다. 김백일은 반란의 주도인물로 제14연대 소속 김지회 중위를 적군의 수괴로 지목하였다. 군 수뇌부는 사건 발생 6일이 지난 후 처음으로 제14연대 장교를 ‘반란의 수괴’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김지회가 백운산에 잠복하고 있다고 하였다.

▲ 1948년 제14연대 제1기 하사관 후보생 기념사진. 제일 앞줄 왼쪽에서 여덟 번째가 김지회이다.

▲ 김지회
김백일의 전투경과와 국회 보고 등을 종합해 검토하면, 정부가 생각하고 있는 반란의 주모자는 김지회를 비롯하여 홍순석(洪淳錫), 이기종(李祈鍾) 등 제14연대에서 3명의 중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들은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 동기생이다. 이날 김백일의 기자회견 이후 국방부 발표와 언론에서 김지회를 ‘적군의 수괴’, ‘반란의 참모장’, ‘총사령관’으로 불리우며 군의 토벌 대상 일순위에 올랐다. 당시 기자의 보도를 살펴보면,

반란군의 주모자 김지회(金智會)는 국군사관학교 三기 졸업생으로 이십 육세, 육군 중위 14연대대 중대(中隊)장이었다고 한다.<『서울신문』, 1948년 11월 3일>

지난 30일 호남지방 작전 사령부 북부지구 전투부대 참모총장 위(魏)소령 발표에 의하면 이번 반란사건의 주모자 육군 중위 김지회(金智會)는 방금 부부 동반하여 지리산에 도피 중에 있다 하는데 국군에서 군, 경, 민 누구를 막론하고 전기 김지회 부부를 체포하는 사람에게는 五十만원 사살하는 사람에게는 二十五만원의 현상금을 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기 김지회의 처는 전 광주의대 부속병원 간호원이었다고 한다.<『경향신문』, 1948년 11월 4일>

김지회의 신상에 대해 국군 지휘부는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지회의 처(애인)에 대한 신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지회 부부를 체포하는 자에게 현상금을 내걸었으며, 윤치영 내무장관은 “지리산 포위전에서 19일 반도 300명을 체포하였는데, 그 당시 주도인물 김지회도 잡혔다”는 허위발표도 있었다. 이처럼 정부와 국군에서는 김지회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는 여순사건의 핵심적 인물이 ‘김지회’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발발에서부터 1949년 4월 9일 김지회가 사살될 때까지 ‘반란’의 표적인 된 인물은 김지회였다. 그런데 왜 민간인 송욱을 체포하여 ‘총지휘자’로 둔갑시켜 발표하였으며, 언론은 대서특필하였을까. 그리고 여순사건 발발 19년이 지난 1967년에는 느닷없이 지창수를 여순사건의 주모자로 몰았던 것일까.

국군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이승만 정부는 어떠한 식으로라도 책임을 져야 했다. 국회에서는 이를 추궁하였고, 이승만 정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송욱 교장이 구세주처럼 등장하였다. 송욱 스스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군의 치밀한 조작이 있었다. 정부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국군의 반란’을 ‘민간인의 반란’으로 역전시켰다. 여기에 일부 군인이 동조한 것이라고 정부는 앞장서서 발표하였다. 정부는 군인 반란이라는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국군의 내부적 요인보다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반란이 발생했음을 국민에게 알리기 바빴다. 정부의 이 같은 끊임없는 노력은 송욱을 반란의 총지휘자로 만들었으며, 또, 책임이 지역민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지창수의 등장은 당시 모병제였던 것을 고려하여 착안한 시나리오였다. 이때는 군의 책임 회피와 공산주의자의 지령이 있었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즉,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에게 군의 위용을 드러내야 하며 공산주의자를 혐오해야하는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여순사건이 군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했으며, 또 ‘반란’이 남로당의 지령으로 발발했음을 국민에게 인식시켜야 했다. 그런 점에 지역 출신 중에서 당시 특무상사이며 연대 인사계였던 지창수 상사는 적임자였다. 1967년을 기화로 남로당 지령 아래 지방 좌익과 좌익 군인의 합작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제14연대는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빨갱이 소굴’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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