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연 국회의원의 빨갱이 전모2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평화일보가 제기한 것은 반군 점령 기간 중 열린 인민재판 배석판사였다는 것이며, 국회에서 양국 철퇴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인민재판은 ‘반란’과 직접 관련이 있어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양국 철퇴는 ‘반란’ 사건과 무관한데도 황두연 의원이 양국 철퇴를 주장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미군 철수 문제는 이승만 정부의 정책과 반대되었다. 국내 기반이 견고하지 않은 이승만에게 미군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국회 소장파를 중심으로 미군 철수를 주장하면서 이승만 정부는 곤욕스러웠다. 따라서 평화일보는 미군 철수를 주장한 국회의원을 좌익분자로 몰아가기 위해 ‘양군 철퇴’ 문제를 거론하였다.

그렇다면 황두연은 양군 철퇴를 주장했던 것일까. 1948년 10월 13일 제87차 임시국회에 47명의 국회의원 연서로 ‘외군철퇴요청에 관한 긴급동의안’이 제출되었다. 이때 황두연은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회에서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을 때도 황두연은 오히려 양군 철퇴를 보류하자는데 동의했고, 결국에는 보류하는 것으로 가결되었다. 평화일보의 보도 내용 중 ‘양군 철퇴’ 주장은 조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황두연 의원이 인민재판 배석판사 등으로 ‘반란군’에 협력했다는 보도내용이 사실인지도 살펴보자. 여순사건 이후 긴급소집된 임시국회에서 황두연의 협력 혐의와 관련하여 김웅진 의원은 국회의원이 선거에 나와 서너 명의 입후보자와 경쟁해서 당선되면 정적은 있는 것이라고 했고, 신성균 의원은 여러 가지 중상모략이 중간에 있으며 국회의원이라 해서 그 지방사람 모두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의원의 발언은 5・10 총선거에서 경쟁했던 누군가의 모략이며, 정적을 제기하기 위해 협력 혐의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황두연이 인민재판 배석판사로 활동했다는데 확신을 갖고 평화일보에 보도를 지시한 양우정은 누구인가. 양우정의 보도 지침은 정치적 술수가 깔려 있다. 양우정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선전부장으로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섰다. 그는 이승만의 비서로 1948년에 『이박사 독립노선의 승리』, 1949년에『이대통령 투쟁사』,『이대통령 건국정치이념』등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글을 남겼다. 양우정의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에 황두연이 걸려든 것이다. 황두연은 반민특위법을 찬성하였으며, 하곡 수집 반대 등의 토지개혁을 비롯한 농민들의 대책을 요구했다. 이승만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다.

평화일보의 기사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순천지역 여덟 개 우익단체도 거들고 나섰다. 황두연 의원이 여순사건에 가담했다고 내무부장관 윤치영에게 진상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이들 우익단체는 황두연을 기회주의자라면서 5・10총선거에서 좌익분자들의 호감으로 당선되었다면서, 교묘하게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또한, 박찬길 검사와 의숙질 관계라면서 여순사건에 솔선수범으로 관여했다는 다섯 개 사항을 적시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 반란군에 자진하여 식사를 제공
2. 살상주모자의 순천부녀동맹위원장 안미희와 살인범 정상기를 북국민학교 교정의 포로 중에서 국회의원 자격으로 신원보증을 하여 석방
3. 황두연 사택에 좌익 살상분자 10여명을 은닉하여 두고 있다가 안전지대로 도피케 하였음
4. 자택에 인공기를 2일간 게양하였음
5. 박찬길 검사와 같이 인민재판 배석판사 격으로 진언하였기 때문에 황두연 반대파의 선거활동 분자들에 대한 살상을 공공연하게 표시하게 되었음<『평화일보』, 1948년 11월 9일>

진상보고서에 눈여겨볼 사항은 다섯 번째이다. 황두연이 5・10선거에 반대파로 나선 한민당 김양수 선거운동원과 지지자들을 공공연하게 살상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황두연이 개인적 감정을 앞세워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반란’이란 기회를 이용해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진상보고서의 신빙성을 강조하기 위해 국군 제2여단 특별조사관 대위 김용주가 조사한 내용이며, 군사부에 제출되어 있다고 재차 강조하였다. 황두연과 그 아들이 동분서주하며 ‘반란’사건과 관련 없다고 해명하고 있을 때 현지에서 올라온 진상보고서는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상보고서를 작성한 단체를 살펴보면, 국민회 순천지부, 대한청년단 순천군단부, 순천의용단, 한민당 순천지부, 전국학련 순천지부, 민족청년단 순천단부, 대한노총 순천군연맹, 순천사변대책위원회 등 여덟 개 우익단체였다. 김양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체들이 대부분이다. 선거 패배 이후 절치부심하고 있던 김양수를 비롯한 우익단체는 ‘반란’을 구실삼아 황두연을 제거할 기회로 판단하고 진상보고서를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두연의 ‘반란’ 협력 혐의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하는 반대파의 음모와 근거 없이 조작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해프닝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이를 정치적 해프닝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정치적으로 견해를 달리하는 세력은 ‘빨갱이’로 간주하여 탄압하는 사회정치적 구조를 만들어 냈다. 지역적 측면에서 보면, 여순사건 이후 순천이 다른 지역과 달리 세력 간의 갈등이 비교적 컸다. 그 이면에는 이처럼 허무맹랑한 조작으로 이념 갈등을 연출한 측면이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이념적 갈등은 당시만의 상처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면서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절치부심하고 있던 김양수는 이 기회를 바탕으로 우익단체의 결집을 견고하게 구축하여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황두연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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