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광주전남 출신으로『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은 155명이고, 전남 동부지역 인물로 순천과 여수가 각각 6명이고, 보성이 3명이라고 했다. 글을 쓰면서 더욱 세밀하게 분석한 결과, 고흥 2명, 광양 4명, 구례 4명이 더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보성과 광양 출신으로『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을 살펴보자.
김호량(金鎬樑, 金子淸)은 1923년 보성 출신이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1942년 7월에 졸업한 후 1942년 10월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해서 1944년 4월 제57기로 졸업했다. 박정희와 동기이다. 견습사관을 거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여 일제 패망 때 일본군 중위로 복무했다.

안용백(安龍伯, 竹山龍伯)은 1901년 보성 출신이다. 1925년 경성제국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1930년 졸업했다. 1930년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근무하다 1936년 편수서기에 임명되어 1941년까지 재직했다. 재직 중이던 1938년 친일단체인 녹기연맹의 연맹원으로 참여했고,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훈련부와 선전부 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는 『문교의 조선』, 『조선』, 『녹기』, 『내선일체』등의 친일잡지에 내선일체와 각종 황국신민화 정책을 찬양하고 선전하는 글을 기고했다. 1941년 6월 군수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군수로 재직, 1942년 7월 경상남도 하동군수로 옮겨 근무했다. 해방 후 경남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역임했다. 1958년 제4대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고향 보성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선거과정에서 부정이 탄로나 당선무효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임석규(林淅圭)는 1899년 보성에서 태어났다. 1921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지방법원 서기과 서기로 근무했다. 1926년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했고, 같은 해 7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판사에 임명, 1928년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 판사로 재임 중에 쇼와(昭和) 일왕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청 판사,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판사, 함흥지방법원 북청지원 판사 등을 역임했다. 1937년과 1942년 서보장(瑞寶章) 훈6등과  훈5등을 받았다. 1942년 평양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해방 이후 1953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에 임명, 1959년 광주지방법원 법원장, 1961년 부산지방법원 법원장을 역임했다.

김정호(金正晧)는 1909년 광양에서 태어났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을 졸업하고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는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제3기로 입교하여 졸업했다. 1935년 만주국 군수 소위였으며, 1936년 9월 중위로 진급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 경리 소좌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서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장에 임명되었고, 경상북도 철도경찰청장, 충청남도 철도경찰청장을 거쳐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주한미군정청 경무부 공안국장을 맡고 있어 경무부장 조병옥과 함께 이 사건의 주무 담당자 중 한 명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 육군 소령으로 특별 임관했다. 이후 호국군 제105여단장, 전북지구 계엄민사부장, 육군본부 병무감 등을 역임했다. 국방부 제3국장과 합동참모본부 제1부장과 제3부장을 지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뒤 1954년 제3대 총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광양에서 출마해 당선했다.

조재천(曺在千, 昌山幸右)은 1912년 광양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 법학과를 다니면서 1940년 8월 조선변호사시험,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그해 12월 주오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1941년 1월 조선총독부 사법관시보로 광주지방법원 및 동 검사국에서 1년 6개월간 근무했으며, 1943년 3월 평양지방법원 예비판사를 거쳐 같은 해 7월 판사에 임명되었다. 1945년 6월 평양지방법원 검사로 옮겨 해방 때까지 근무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에 의해 법무국 특별감찰청 검사에 임명, 1946년 1월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에 임명되어 같은 해 7월 이른바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의 담당검사로 활동했다. 1948년 1월 철도관구 경찰청장, 9월 제1관구 경찰청장, 11월 경무관으로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1월 경상북도 경찰국장을 거쳐 1950년 1월 경상북도지사에 임명되어 6・25전쟁 중 퇴직했다. 1954년 6월 대구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으며, 제4대, 5대 민의원에 거듭 당선되었다. 1960년 민주당내각 성립과 함께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1961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퇴임했다.

엄상섭(嚴詳燮)은 1908년 광양에서 태어났다. 1926년 전남공립사범학교 졸업하고 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지내다가 1938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41년 광주지방법원검사국 예비검사를 거쳐 광주지방법원검사국 검사에 임명되었다. 1942년부터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검사를 지냈다. 해방 이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찰청 검사 등을 지내다가 1949년 퇴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1950년 홍익대학교 학장을 지내다가 제2대 민의원 선거 때 광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 엄상섭의 양심고백 기사(1948년 8월 24일, 경향신문)

1951년 3월부터 12월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했고, 1960년 4월 내각책임제 개헌기초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일제강점기에 검사로 재직했던 경력을 반성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되자 다른 검사 7명과 함께 “인신 쇄신과 민족정기 앙양에 협조하기 위해서” 검사직을 사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56년 출간한 『권력과 자유』에서 조선총독부 검사생활을 “왜정 압력하에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시던 애국지사들에게 대하여는 지금도 면목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함양수(咸良守)는 광양 출신이다. 1920년 경상남도 순사에 임용되어, 1930년 진해경찰서로 옮긴 뒤 1931년부터 고등형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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