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군․경․검 합동수사본부에서 밝힌 진상조사에 대해 경찰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박찬길 검사 사건의 주요 인물인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의 경력을 잠시 살펴보자. 최천(1900년생)은 경상도 통영 사람이다. 기미년(1919년)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었으며, 동아일보 통영지국장을 역임했다. 1927년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 김기정의 ‘한국인 교육의 불필요 및 한국어 통역 철폐’ 주장에 대한 징토(懲討)시민대회 개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1929년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했으며, 1931년 5월 신간회 제2회 전체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1930년 중반부터 통영산업조합에서 활동했다. 여기까지는 기록상으로 존재한다.

1942년 2월에 항일운동을 모색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4월형을 언도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검사 기소장과 판결문 등 관련 자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신문 기사 한 줄도 없다. 최천은 주로 경남 통영에서 활동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최천이 등장한 곳은 제주경찰검찰청의 청장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제주경찰청장쯤이다. 그의 행적에서 경찰의 경력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제주도와 연관성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제주경찰검찰청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는지 다소 의아하다.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이 반민특위 재판장에서 자신에게 고무신을 던진 군중에게 다가가 옷을 벗어 총탄을 박힌 곳들을 가리키며 늘어놓은 영악한 괴변. 그 괴변의 향기가 염석진 한명에 불과했을까. 반민족 매국노가 경찰, 군, 행정을 모조리 장악한 나라에서 변신은 무죄였다. 그렇다고 최천이 변신했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1930년대 중반 이후 그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고, 해방 이후 경찰 간부로 등장한 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제주4․3항쟁이 확대된 1948년 6월 최천은 제주도를 떠났다. 그리고 전남경찰청 부청장으로 여순사건을 맞이한다.

군․경․검 합동수사본부 외에도 전남지방검찰청에서도 별도의 조사를 벌였다. 광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 기세훈이 밝힌 내용을 보면 “10월 24일 오전 11시 순천 북국민학교 교정에서 당시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박찬길(당시 38)씨가 인민재판장을 했다는 이유로 총살하고,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서기 방기환(30)씨도 총살하였다”고 밝혔다.

기세훈 검사는 당시 박찬길 검사의 총살 관계자인 순천경찰서 사찰주임 배아무개와 사찰계원 최아무개 씨를 취조했으며, 대구 고등검찰청에서는 당시의 경찰 전투사령관인 崔某(최천)도 취조 중에 있다고 밝혔다. 기세훈 검사의 진상조사에는 총살 집행에 대해 계엄사령관에게는 하등의 연락이 없었으며, 당시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이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집행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사건이 논란되었을 때 최천은 모든 책임을 국군에 전가했다.

박찬길은 순천 인민재판 재판장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박찬길 검사의 총살을 주도한 사람이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협력자 색출에 혈안인 된 혼란기를 이용하여, 경찰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박찬길 검사를 척결했다. 그리고 적구검사로 조작한 것이었다. 박찬길 검사의 ‘빨갱이’ 협력 혐의가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책임을 묻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죄를 짓는 것과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동일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박찬길 유가족이 법무부장관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1949년 3월 검찰 내부보고로 논란이 된 시점인 1949년 4월 내무부에서는 최천을 전남경찰청 부청장에서 경북경찰청 경무과장으로 인사 조치했다. 우여곡절 끝에 재조사가 진행되었다. 대상은 순천경찰서 사찰계 형사와 경찰 간부였다. 이들을 한 명씩 불러 조사가 시작되자 경찰 측의 대표로 참여한 김남영 총경은 이에 반발하며 별도의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했다.

진상조사가 진행되면서 사찰과장 등 4명이 검찰에 구금되자, 전남경찰은 총기와 각종 장비를 경찰청 뒷마당에 버려놓고 일체의 훈련과 직무를 중지하는 보이콧을 단행했다. 치안업무가 공백에 빠지고 검․경의 대립이 날카로워지자 이범석 국무총리와 각부 장관이 중재에 나섰다. 4명의 경찰관은 구금된 지 하루 만에 풀려났다. 최천도 대구지검에 이송했으나 경북경찰청이 강력히 항의하는 바람에 검찰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권승렬 법무부장관은 헌법과 법률적 견지에서는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공산주의자를 잡는 진압 경찰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또한 국가의 방비를 위해서는 다소간 인권을 유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법무부장관마저 국민의 인권은 안중에 없는 나라가 이승만 정부의 모습이었다.

국회에서도 조국현 의원은 동료나 친척을 잃은 군경의 심리가 ‘백 퍼센트 환장이 되었을 그 판’에 옥석을 가릴 여유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조헌영 의원도 시국 수습의 책임을 맡아 목숨을 걸고 싸운 최천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은 언어도단이라며 이러한 조치는 평상시에 법치국가만 생각하고 대한민국의 현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조한백 의원도 공산당과 투쟁하는 사람을 죽인다면 국가의 치안을 혼란케 할 것이라면서 경찰 측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했다. 국회의원들마저 경찰의 논리를 대변했던 것은 당시 경찰 권력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박찬길 검사가 여순사건 당시 인민재판 재판장을 지냈다는 혐의는 풀렸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몇몇 기록물에는 ‘빨갱이 검사 박찬길’을 거론하고 있다. 여순사건이 발발한 전남동부지역을 빨갱이 지역으로 매도하기 위한 좋은 소재로 여전히 유효함을 알 수 있다.

또,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해자에 대한 진실규명도 없이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왜곡된 역사를 청산하기가 얼마나 험난한 여정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으로써, 여전히 현재도 진행형인 역사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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