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연 국회의원의 빨갱이 전모1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여수는 반군과 지방 좌익이 8일 동안 점령하였다. 순천은 3일 동안 점령하였다. 여수와 순천의 인명 피해 규모는 비슷한데, 학살의 참상은 순천이 더하면 더했지 못했다고 할 수 없다. 우익이나 좌익을 가리지 않고 참혹한 학살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몇몇 유명인사의 상황을 살펴보면, 순천 출신 황두연 국회의원은 빨갱이로 몰려 죽을 고비를 맞았다. 순천지청의 박찬길 검사는 빨갱이로 몰려 처형당했다.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은 좌익에 의해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당시(1948년) 황두연 국회의원과 박찬길 검사가 여순사건과 관련되었다는 보도는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다. 먼저 황두연 국회의원과 관련된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948년에 있었던 5・10선거 때 순천 갑구는 황두연(44세.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김양수(53세. 한민당), 박옥신(48세. 대한부인회) 등 3명이 출마하였다. 순천 을구는 심의현(52세. 무소속), 서정기(61세. 무소속), 조옥현(46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계수(52세. 한민당) 등 4명이 출마하였다. 갑구에서는 황두연이 1만 4677표(52.9%)로 김양수가 득표한 1만 1508표(41.5%)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변이었다. 을구에서도 조옥현이 1만 4911표(48.2%)로 김계수 6068표(19.6%)를 큰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김양수와 김계수는 당시 가장 유력한 한국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고배를 마셨다.

황두연과 겨룬 김양수는 미국 콜롬비아대학과 런던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쌀 3000석 이상의 대지주였다. 김양수는 8・15 해방과 함께 우익인사를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 순천지부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9월 9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미군정 체제가 이루어지고, 이승만 등 해외인사들이 입국하면서 국내정세를 탐지하고 있던 김양수는 9월 23일 미 전술군이 순천에 진주하자 건준을 이탈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지방에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9월 25일 한국민주당 순천지부를 결성하였다. 미군 진주 이후 김양수는 순천 군수로 임명되었고, 친일경찰 출신이었던 이종수를 순천경찰서장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인민위원회의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인민위원회는 일제강점기에 소작쟁의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김양수의 화려한 이력과 달리 황두연은 재산이나 이력이나 조직 등 모든 면에서 김양수에게 압도당했다. 그런데 5・10 총선거 결과는 정반대로 황두연이 거물 김양수를 잡은 것이다. 김양수 뿐만 아니라 김양수를 따르던 이종수 등 우익세력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절치부심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 여수 출신 황병규 의원, 순천 출신 황두연 의원, 광양 출신 김옥주 의원 등이 10월 27일 국회 임시회의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행방불명 등 신변에 문제가 있다는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였다. 다음 날(10월 28일) 황병규・김옥주 의원은 무사히 국회에 출석하였으나, 황두연 의원은 순천 선교사 집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국회가 입수하였다. 국회는 대책반을 꾸려 그의 신변 보호를 내무부와 국방부에 요구하였다.

그런데 10월 30일 신문에는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기사가 보도되었다.

[순천에서 본사 특파원 李志雄 27일발 = 延着]. 현지 검사인 朴贊吉이가 소위 순천 인민재판소의 재판장이었다는 것은 別報한 바와 같거니와 국회에서 양국 철퇴를 열렬히 부르짖던 순천 선출 국회의원 황두연이 소위 배석판사였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한다. 즉 황은 국회 휴회 중 고향에 내려갔던 것인데 사전에 반란군과 모종의 연락이 있었던 것이라 하며, 양군 철퇴를 부르짖는 자들의 정체는 이렇다는 것을 민중 앞에 여실히 폭로시키고 있다. 한편 이 정보에 접한 내무부에서는 체포령을 내렸다 한다.(사진은 황두연)<『평화일보』, 1948년 10월 30일>

▲ 평화일보가 1948년 10월 30일 자로 보도한 황두연 국회의원 관련기사.

순천에서 소위 인민재판이 있었다. 여기에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가 재판장을 맡고, 배석판사로는 황두연이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회에서 ‘양군 철퇴’를 주장한 황두연이 ‘반란군’과 모종의 연락이 있었다고 보도한 것이다. 그리고 내무부에서는 황두연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기사의 사실 여부를 살펴보자. 이날 기사는 평화일보의 이지웅 기자가 단독으로 보도한 것이다. 이지웅 기자는 여순사건 당시 여수・순천에 파견된 특파원으로 10월 27일 황두연과 관련한 내용을 취재하였고, 곧바로 중앙청 출입기자인 장기봉에게 전달하였다. 장기봉은 평화일보 사장인 양우정에게 이를 보고하고, 양우정은 사회부장과 편집부장에게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28일 오후 3시 국회 출입기자 박상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정보를 가져왔고, 황두연의 자제 황현수가 평화일보에 찾아와 사실이 아님을 해명했다. 또한, 합동통신에서는 김웅진 의원이 국회에서 “황 의원은 순천 외국인 선교사 집에 피신해 있다”고 한 발언을 보도함으로써 28일 평화일보에서는 게재를 보류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다음날(29일) 양우정 사장은 29일 장기봉 기자의 주장과 현지 이지웅 특파원의 취재를 절대 확신하면서 황두연에 관한 기사를 내보내라고 편집국에 지시했다. 10월 30일 평화일보는 「인민재판 배석판사는 국회의원 황두연의 판명」이란 제목으로 보도하게 이르렀다. 황두연 의원은 한순간 빨갱이 국회의원으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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