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새누리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이 논란이다. 보수단체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라면서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와 역사교사들은 “국정 교과서가 아이들의 역사의식을 왜곡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 7일 역사교육연대회의는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 발행된 국정교과서인 ‘초등 5학년 2학기 사회’를 분석한 결과에 대해 중간발표를 했다. 이 자리에서 역사교육연대회는 국정교과서에 나타난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국정교과서 폐기를 주장했다.

그 근원은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친일 역사 청산의 핵심은 인물이다. 따라서 「전남동부지역의 친일파는 누구인가?」 두 번째 편으로 여수 출신 중『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6명의 면면을 살펴보자.

김수인(金守仁, 金家守仁)은 1892년 여수에서 태어났다. 1921년 국내에서 의열단 폭탄사건 연루자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복역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蘇州)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쉬저우동화회 복지부장과 회장, 쉬정우계림회 회장을 맡았다. 계림회는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중국 관내 각 지역에서 내선일체 고취와 전쟁협력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친일단체로서 일본 영사관, 일본인 거류민단, 일본 상공회 등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일본군 위문금품 모집, 국방헌금 모금, 신사참배, 조선 징병제 실시 감사 축하식 거행 등 다양한 친일 활동을 전개했다.

김한승(金漢昇, 金光漢昇)은 1869년 여수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말기에 여수군 주사 등 하급 관리직을 지냈으나, 경술국치 이후 1910년 9월 전라남도 여천금융조합이 설립되자 조합장에 취임하여 1923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20년에는 전라남도 도평의원에 선출되어 세 차례 연임했으며, 1928년 11월 쇼와(昭和) 일왕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2년 6월에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1935년 6월까지 재임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35년 10월에 시정 25주년기념 표창을 받았다. 1938년 12월에 간행된 ≪경학원잡지≫ 제43호에 「황군위문시」를 기고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김우평(金佑坪)은 1898년 여수에서 태어났다. 김한승의 둘째 아들로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경제과를 졸업한 후, 뉴욕의 콜롬비아대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27년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35년 3월 만주국 재정부 촉탁에 임명되어 근무, 1936년 11월 사무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만주국 협화회(協和會) 조선인민회 분회 상임간사를 지냈다. 만주국 협화회는 일본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 아래 ‘민족협화’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실천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 교화적, 정치적 실천 단체’를 표방하고 조직된 전국적인 친일조직이다. 협화회는 각 지역에 분회를 조직하여 만주국 지배체제 안으로 민중을 끌어들이면서 항일민중운동에 대한 내부교란과 파괴공작, 선전선무공작, 전시동원의 역할을 담당한 민중통제 조직이었다. 그는 1937년 7월 이사관으로 승진해 경제부 대신관방 이사관으로 전임되었다. 해방이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장면내각에서 부흥부장관을 역임했다.

김준평(金準枰, 金光準枰)은 1904년 여수에서 태어났다. 일본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1925년 4월~1928년 3월)를 졸업했고 1927년 12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귀국 후 1928년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 검사 대리를 지냈으며, 1929년 12월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임용이후, 대구복심법원 판사, 경성복심법원 판사, 평양지방법원 부장판사 등으로 근무했다. 당시 조선인으로 부장판사에 임명된 경우는 조진만(趙鎭滿)과 김준평 뿐이다. 판사 재임기간 각종 항일운동 재판에 참여했다. 1940년 1월 5일『매일신보』에 「오해하지 말라, 제씨창설에 대하야」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적극 호응했다. 김한승이 작은아버지이다.(사진 참조)

▲ 최재성,『1930년대 여수지역의 공업화와 그 전후의 변화』에서 인용

김상순(金相淳)은 1871년에 여수 거문도에서 태어났다. 1906년 8월부터 황해도 경무서 경무관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경무서 경무관, 전라북도 경시 등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전라북도 경무부 경시에 임명되어 근무하다 1911년 4월 퇴직했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23년부터 3차례 거쳐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면협의회원에 당선했다. 면협의회원 재임 중 쇼와(昭和) 일왕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5년 광주부로 승격되면서 광주부 부회의원에 선출되었다. 전라남도 광주부회 교육부회 부의장, 광주부교육회 명예회원, 광주번영회 평의원을 맡았다.

최종석(崔宗錫)은 1908년 여수에서 태어났다. 경성법학전문학교(1928년 4월~1931년 3월)를 졸업했다. 일본 니혼(日本)대학 야마오카(山岡) 연구실에서 법학을 연구했다(1935년 10월~1936년 6월). 1937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8년 광주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 시보에 임명된 이후 대구지방법원 검사,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진주지청 검사 등을 역임하고 1942년 9월 퇴직했다. 이후 경성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친일인명사전』의 지역 분류에 여수출신은 아니지만, 여수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 김영준(金英俊, 金谷英俊)이 있다. 김영준은 1900년 경남 의령군 의령읍 대산리에서 극빈한 농가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31년 여수에서 천일고무 공장을 설립하면서 주로 여수에서 활동한 기업가이다. 1941년 5월 전라남도 도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7월에 방공(防空)통신용 경찰전용선 전화 가설비로 1만 원을 헌납했고, 1941년 9월에는 전쟁협력을 위한 전시 최대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전라남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2월에는 군용기 ‘여수 김영준호’ 1대 구매비로 10만 1000원을 헌납하기로 약조하고, 1942년 1월 14일 5만 3000원을 조선군 애국부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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