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순천 갑구 황두연 의원의 ‘반란’ 협력 혐의에 등장한 인물이 순천지청 박찬길 차석 검사이다. 박찬길 검사(당시 38세)는 반군이 순천을 점령할 때 인민재판의 재판장을 역임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게 처형당했다.

박찬길 검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숭의실업학교와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다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장로교 총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부인과 3남매와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법관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평양 조만식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박찬길이 경찰에게 처형된 날은 순천이 진압된 직후인 10월 23일이다. 1948년 10월 27일, 제89차 국회 임시회의에서 당시 내무부장관 윤치영이 국회에 보고한 내용을 옮겨보면,

반도는 승천의 여세로 순천 우익요인, 경찰관 가족을 살해 학살하고 순천서·군청·읍사무소·전기회사·은행 등 금융기관을 완전접수한 후 인민공화국 국기 급 간판 등을 게양하고 자칭 계엄령을 발포하여 당지 재판소를 인민재판소로 개칭하여 순천검사국 국장 朴昌吉검사를 재판관으로 하여 학살·약탈 등의 만행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박창길로 알려졌으나, 이후 바로 잡았다. 또, 10월 25일에 처형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23일 관군이 탈환한 후 인민재판장이었던 박찬길 검사를 위시하여 치안서장 서준필, 부성장 김홍연 등 좌익 폭도 21명을 교정에서 경찰이 총살 집행하였다”고 당시 자유신문이 보도했다.

▲ 박찬길 검사 총살 당시의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
법무부장관 권승렬도 국회 보고에서 총살일자를 10월 23일과 10월 24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고하는 과정에서 날짜의 오기로 10월 24일이 언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의『Daily Worker』라는 신문에도 10월 23일 총살된 시신의 사진이 촬영되어 있다. 박찬길을 비롯한 21명의 시신들로 예측된다. 순천이 진압군에 탈환된 10월 23일부터 순천북국민학교와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에서 학살이 있었다. 박찬길의 처형을 주도한 사람은 제8관구 경찰청(현 전남경찰청) 부청장인 최천이다.

그렇다면 박찬길은 인민재판에서 재판장을 했던 것일까. 1949년 10월 5일, 제14차 국회 임시회의로 가보자. 경북 청송군 출신 김봉조 의원은 개인적으로 박찬길 검사와 잘 아는 사이라면서 이 사건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의 발언을 옮겨보면,

박찬길은 도무지 인민재판에 배석한 일도 없고 밖에 나온 일도 없이 숨어 있었습니다. 숨어 있다가 국군이 들어와서 평온해진 뒤에 또 다 나오라는 관의 지시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는 죽을 줄도 모르고 나왔더니 좌익을 뽑아내는 사람이 제일착으로 박찬길을 뽑아냈습니다. <중략> 그 사람이 인민재판에 배석하지도 않고 좌익도 아닌 것을 좌익이다, 배석하지 않은 것을 배석했다고 죽여 놓고 좌익을 응징한다는 정치적 효과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만약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치국가의 인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박찬길은 인민재판에 배석한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숨어 있다가 진압군이 진압한 이후에 나왔는데 좌익으로 간주하여 제일 먼저 처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찬길은 왜 좌익을 몰렸던 것일까. 박찬길은 미군정기부터 경찰과 갈등이 있었다. 경찰이 너무 무모하게 사람들을 범죄혐의자로 몰았으며, 경찰이 좌익 혐의자로 검찰에 넘기면 그는 무혐의 처리하거나 경범자로 처리했다.

특히, 여순사건 발발 이전에 경찰관이 산으로 달아난 좌익혐의자를 총을 쏴 다리를 맞혔는데, 경찰관은 쓰러진 사람에게 총을 한 방 더 쏘아 죽이고 말았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좌익이 아니라 산림을 도벌하던 민간인이었다. 이 사건을 맡은 박찬길 검사는 경찰관에게 10년 형을 구형했다. 순천경찰은 박찬길이 적구(赤狗)검사라는 보고를 검찰청에 올렸다. 경찰은 박찬길 검사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리고 여순사건이 발발했다.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은 순천 경찰관들의 보고에 따라 박찬길을 적구검사로 간주하고, 23일 총살했다. 그리고 현직 검사가 경찰에 의해 즉결처분되었지만, 세간에 큰 이목을 끌지 못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총살에 대한 적법성에 대해서나 박찬길 검사의 좌익 관련 등에 대해 별관심을 갖지 않았다. 경찰과 언론의 보도에서 ‘적구검사’라는 불똥이 또 다른 모양으로 튈 것을 우려하여 그냥 넘어갔다.

남편이며 아버지를 하루아침에 잃은 유가족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당시 경찰 책임자를 처벌해달라는 탄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했다. 정부에서는 군․경․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법무부 검찰과장 선우종원 검사, 대검찰청 정창운 검사, 국방부 정훈감 김종문 중령, 내무부 치안국 수사지도과 김남영 총경 등 4명으로 구성하여, 현지 진상조사에 나섰다.

▲ 박찬길 검사 사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실시한다는 보도 내용

약 2주일 조사 끝에 박찬길 검사의 총살은 부당하며, 이는 당시 경찰책임자였던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 총경의 모략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경찰은 최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여순사건에서 희생당한 경찰에 대한 모욕이고,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독자적인 경찰보고서를 치안국장에게 올렸다. 경찰의 반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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