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 소장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 지역도 당연히 그 변화의 물결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느냐는 것이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를 변화시켰다. 하나는 반공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분법적 사회구조이다. 반공주의는 누구나 쉽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분법적 사회구조는 무엇일까. 모든 것을 옳거나 그름으로 판단했다. 옳음의 기준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적’이 되었다. 그런 개연성이 있는 사람마저 ‘적’으로 간주했다.

‘적’으로 간주한 국민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국가 권력이 동원되었다.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이 탄생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문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 변화에 국민들도 빠져들었다. 이승만 정부의 왜곡된 세뇌는 여순사건 자체를 거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했다. 여순사건을 말하는 것은 ‘용공주의자’이며 ‘빨갱이’이며 ‘적’이었다.

▲ 호남지구 작전사령부에서 작전회의하고 있는 모습, 왼쪽 첫 번째가 박정희이고, 두 번째가 송호성 사령관이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오롯이 이승만 정부에만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더 고착화되었다. 세간에 박정희가 여순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 들린다. 이를 감추기 위해 박정희는 ‘빨갱이’ 탄압에 더 열을 올렸다고 지역의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중 여수에서 풍문으로 전해지는 것이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이다.

필자가 『불량 국민들』을 펴낸 이후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찾아본 것이 박정희와 여순사건 기록이다. 특히 지역에서 말하는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이다. 이우헌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인물이다. 1963년에 있었던 제6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처음 실시한 국회의원 총선거이다. 부연설명하자면, 당시 여수지역구에는 유경식(1911년생)과 이우헌(1902년생)이 민주공화당 공천을 신청했다. 유경식은 여수에서 유명했던 제중의원 원장으로 의사였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경식이 공천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 이우헌이 공천을 받았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옮겨보면, “1948년 여순사건 발발 당시 박정희가 14연대 대위였으며, ‘반란’의 주모자로 쫓기던 중 이우헌이 집에 숨겨주어 살아났다. 그리고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보은차원에서 이우헌을 공천했으며,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역의 몇몇 어른들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풍문이다.

필자가 “그것이 아니다”고 하면, 어른들은 더 역정을 내면서 “뭘, 아느냐고” 호통을 친다. 당시를 살아온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르신들에게 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고, 논란도 몇 차례 거듭하였기에 필자의 연구가 잘못되었는지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사료 찾기에 나서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는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은 풍문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湖南地區 作戰은 一段落
朴正熙 作戰參謀 記者에 言明
[光州 六日發 合同] 호남지구 작전참모 박정희(朴正熙)소령은 五일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금번 반란사건에 대하여서는 순전히 국군의 독자적 작전이다. 항간에는 배후 지휘를 미군이 하고 있다고 유포되고 있으나 이것은 허설이다. 그리고 호남지구 작전은 이로 一단락되었으며 현재는 구례동북지구 지이산록에 약 백五십명 가량의 무장폭도가 잔재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호남방면 군의 방침은 좌기 二항에 중점을 둔다.
 
一. 무장폭도의 조속 숙청.
二. 작전 중요지구 치안행정과 교육, 생산 등의 각 기관 복구지도.

위 인용문은 평화일보 1948년 11월 10일 자 보도내용이다. 박정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여순사건 진압에 미군이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국군의 독자적 작전이라는 것을 밝혔다. 여순사건은 지휘체계는 미군에 있었고, 무기 등도 미군이 지원했다는 것은 여러 사료로 밝혀졌다. 여하튼 이날 기자회견을 보아도 박정희는 호남지구 작전참모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호남지구전투사령부 남부지구(제5여단장, 김백일 중령)에 속해 있었다.

박정희가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참여하여 언론에 노출된 것은 이날 평화일보가 유일하다. 그리고 호남지구 작전참모로서 작전회의를 하는 사진도 한 장이 남아 있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자회견이 보도된 다음 날인 11월 11일 박정희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서울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박정희가 사형을 언도받고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풀려났다는 사실은 너무 많이 알려졌기에 생략한다.

박정희가 대위 계급으로 14연대 소속되었으며, 여순사건 발발로 인하여 죽을 고비를 맞이했는데, 이 지역 출신인 이우헌이 숨겨주어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이우헌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지역의 어르신들은 왜 그렇게 기억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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