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능진의 선거벽보이다.“조국통일을 하야거든!! 동족상잔을 피하야거든!!”이라는 선거구호에서 왜 이승만과 대적했는지 알 수 있다.

최능진은 1949년 2월 8일 공판에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은 지지했지만, 혁명이라는 혐의사실은 부인했다. 특히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족상잔을 나는 절대로 원치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동기를 나에게 전가하는 것은 천만부당이다”고 자신의 관련성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최능진이 5․10선거에 출마한 이유도 이승만의 집권은 남북 분단과 동족상잔의 아픔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능진·김진섭‧서세충에 대한 제1심 선고공판은 1949년 5월 31일 열렸다. 법령 제15호 4조 나항 및 형법 60조(정부계획방해기도죄)를 인용하여 최능진 징역 3년, 김진섭 징역 3년 6개월, 서세충 무죄를 각각 선고했다. 검찰청 송치기록과 제1회 재판과정에서 혁명의용군사건의 최고책임자는 서세충이었다. 그런데 정작 사건의 최고책임자인 서세충은 무죄로 판결되었다. 무죄의 이유가 고령이었다. ‘반란’에 고령이 무슨 상관이 있나.

여하튼 최고책임자는 무죄인데,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유죄이다.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심에 불복하여 최능진‧김진섭은 항소했다. 2심 선고공판은 1949년 11월 2일에 개정되어 내란음모죄와 정부계획방해기도죄를 각각 적용하여 최능진 징역 5년, 김진섭 징역 6년을 선고했다. 1심 선고에 비하여 내란음모죄가 추가되면서 형량도 가중되었다. 형량이 증가된 이유는 한 마디로 ‘코미디’였다.

2심 재판과정에서 최능진이 “여순사건의 주모자 이재복이 사형 집행을 당했으니 추도식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서울형무소에 최능진과 수감 중인 이영개는 5월 27일 형무소 면회대합실에서 최능진이 몇몇 청년죄수에게 이러한 지시를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이영개는 반민특위 혐의자로 수감 중이었다. 이영개의 증언에 대해 서울형무소 간수장 정연과 간수 강중화․김재선은 그러한 지시를 모른다고 했다.

이영개는 미군정시절(수사과장 최능진)에 법령 33조 위반혐의로 최능진에게 체포되어 경찰서에 구금당한 적이 있었다. 이에 따른 사적감정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최능진도 이영개의 증언은 전혀 허위이니 증인될 자격이 없다고 재판부에 각하를 요청했다. 재판부는 이를 사적감정이 아닌, 사실 증거로 인정하고 내란음모죄를 추가했다. 이영개는 법정 증언에서 최능진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그렇지만 재판부는 최능진 뿐만 아니라 김진섭까지 내란음모죄를 적용하여 형량을 선고했다. 이는 혁명의용군사건의 실체가 존재하며 여순사건과 관련이 있는 반란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최능진‧김진섭은 상고했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재판은 중단되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최능진은 조속한 전쟁 중단을 촉구하는 정전․평화협정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 이후 내란혐의로 체포되어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32조 이적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1951년 2월에 경북 달성군 파동의 산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 혁명의용군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높은 형량은 받은 사람은 김진섭이다. 하지만 이후 혁명의용군사건과 관련한 정부기록물에는 최능진과 오동기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김진섭의 신상이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해 정부는 공산주의자 민간인과 국군이 결합한 국가 전복사건이었다고 발표했다. 국가 전복사건의 핵심 군인이었던 오동기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가 6․25전쟁 이후 여러 정황이 참작되어 5년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혁명의용군사건을 부인했으며, 여순사건과도 무관하다고 항변했다. 최능진도 동족상잔의 반란에 대해 적극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혁명의용군사건과 여순사건을 아직까지도 하나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여순사건이 오랫동안 계획된 공산주의자 반란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최능진을 제거하기 위해 이승만 추종세력과 경찰의 무리한 수사로 만들어진 사건이 혁명의용군사건이다. 정치적 조작이 내포되다 보니 국가를 전복할 반란의 최고책임자에게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군인이며 반란의 핵심 인물에게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징역형에 머물렀다. 반역을 가장 큰 범죄로 다루었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조작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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