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센터 소장
여수 주둔 14연대에서 ‘반란’이 처음 외부로 전해진 것은 10월 20일 새벽 1시경 여수 철도경찰 여자전화교환수가 순천철도경찰서에 통지하면서 알려졌다. 여수 14연대에 통신중대가 있었음에도 상부에 보고되지 않고, 철도경찰에 의해 처음 ‘반란’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상급부대인 광주 제5여단(제4연대)에 보고된 시간은 10월 20일 새벽 1시를 넘어서이다.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은 제주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겸임하여 제주도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고, 제5여단 참모장인 오덕준 중령은 14연대 제주 파송을 지원하기 위해 여수에 와 있었다. 광주 4연대장 이성가 중령은 서울 출장 중이었다. ‘반란’ 첩보를 입수한 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은 서울 육군 총사령부와 미 군사고문단에 보고했다.

이즈음에 서울 중앙청 기자들도 여순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유건호는 “‘여수에서 국군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순천 쪽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문이 중앙청 기자실에 흘러들어왔다. 몇몇 기자가 내무부 장관실로 뛰어 올라갔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고 무진 애들을 썼으나 도무지 쉬쉬하고 있어 다른 정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얻어내지 못했다”고 여순사건을 처음 접하게 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여수에서 국군부대 반란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전해 들었지만, 기자들도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정부는 국군부대 반란을 보고받고 언론보도 일체를 금지했다. 공보처는 10월 21일에 일체 신문기사를 보류하는 기재유보조치를 단행하면서, 정부에서 발표한 내용만 게재할 수 있다고 했다. 이리하여 여수․순천지역은 다른 지역과의 정보와 교통이 차단된 고립된 섬으로 남았다. 여순사건을 보도한 각 신문의 기사 끝에는 군검열제(軍檢閱濟)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언론보도는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부의 언론 통제 속에서 여순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첫 발표는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의 1948년 10월 21일 기자회견이었다. 이 총리는 ‘사건 진상을 철저규명’이란 제목으로 여수에서 국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전남 여수에는 국군 제14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바, 돌연 20일 오전 2시경 공산계열의 오래동안 책동과 음모로서 반란이 발생하였다. 처음엔 약 40명 가량의 사병이 무기창고를 점령하고 있어서 교묘한 선동과 위협으로 일부 병사들은 선동시켜 가지고 밤중에 다른 병사들을 무기로 위협하고 장교들 대부분을 살해했다.(『동아일보』 1948년 10월 22일)

▲ ‘일부 육군부대 반란’등의 제목으로 당시 보도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순반란사건’으로 바뀐다.

이 총리는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4연대에서 공산계열의 책동과 음모로 반란이 발생하였으며, 약 40여 명의 사병이 주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총리 기자회견으로 여순사건에 대한 언론 기재유보조치는 일시적으로 해제되었다. 10월 21일 광주에서 발행된 『동광신문』은 호외를 발행하여 광주․전남지역에 살포했다. 여순사건과 관련한 유일한 호외로써, “국군 제14연대 반란! 여수서 발단 순천을 점령”이라는 제목으로 이 총리 발표문과 함께 제5여단 여단장 김상겸 대령의 인터뷰 기사도 같이 보도했다. 김상겸 여단장은 당시 제주도에서 급거 복귀하다 보니 사건 발단이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방부는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을 즉시 해임하고 김백일 중령을 후임으로 진압작전에 나섰다.

정부 발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언론에서는 사건의 주체로 ‘국군 제14연대 반란’ 또는 ‘국군 반란’이라는 제목으로 대부분 보도했다. 각 신문의 주요 제목을 살펴보면 자유신문은 “국군 제14연대 내서 반란”, 서울신문은 “20일 여수에서 국군 반란”, 조선일보는 “국군 일부 전남서 반란 좌익과 합세 2천여 명”, 국제신문은 “여수․순천에 국군 반란 21일 정오 현재 교전 중” 등으로 보도했다. 또한, 지방 신문인 호남신문에서는 “국군 제14연대 반란, 여수 점령후 점차 북진” 등 제목을 달았다.

이날 조선일보는 ‘국군 일부 전남서 반란’이라고 표제를 붙였다. 당시 진압 지휘관은 거의 모든 신문이 ‘국군 반란’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조선일보에서는 ‘일부’를 강조한 것이 좋다면서 조선일보를 칭찬하고, 유건호 기자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일선 군인들도 국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작용했던 것으로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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