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센터 소장
10월 21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의 첫 발표를 통해 여순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날 기사의 제목은 ‘극좌극우 공모 폭동의 성질’이었다. 다소 인용문이 길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첫 발표였으니 꼼꼼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본래 수개월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하고 반국가적 봉기군을 책동하여 일으킬 책동을 하였다. 불행히도 군정이양 전이어서 그 가운데 그중 吳東起(오동기)(기자주=최능진과 함께 불구속 송청되었다)란 자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소령으로 승진하여 여수연대장에 취임하였다. 이자는 여수에 가서 소위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단순한 하사관들을 선동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극우 진영인 해외와 국내의 실의 정객들과 직접간접으로 연락하여 가지고 로서아 十월혁명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을 책동하였다. 이것이 군정이양을 시작하면서 약 20일 전에 吳와 관련자를 검거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 음모가 성장해 온 배경이다. 吳와 관계자들을 잡자 군내에 吳와 통하는 자들은 공포심이 일어난 모양인데…
(『자유신문』1948년 10월 22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부터 공산주의자와 극우 정객이 결탁하여 봉기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 지목한 인물은 오동기(吳東起)라는 여수 14연대장이다. 반국가적 봉기를 책동하기 위해 여수연대장으로 취임한 오동기는 하사관 훈련을 명목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면서 하사관을 포섭하였다는 것이다.

▲ 맨 앞줄의 왼쪽 첫 번째에 서 있는 인물이 광복군 출신 오동기이다.

그러면서 기자가 덧붙인 것이지만 최능진(崔能鎭)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도 불구속 송치되었다는 것이다. 즉, 오동기와 최능진이란 인물이 반국가적 봉기를 책동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부가 일컫는 극우정객이 최능진이라는 것인지, 또한 공산주의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여하튼 이들이 러시아 10월 혁명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을 책동했는데, 이것이 ‘여순사건’이라고 이범석 국무총리가 발표한 것이다.

몇 가지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첫째, 극우정객이 누구냐는 것이다. 둘째, 오동기가 14연대장으로 하사관을 포섭했느냐는 것이다. 셋째, 오동기와 최능진은 어떤 관계냐는 것이다. 넷째, 10월 혁명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이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첫째, 정부가 지목한 극우정객은 백범 김구(金九)였다. 김구는 이에 대해 1948년 10월 27일 해명 기자회견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했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했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면서 여순사건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주장을 했다.

둘째, 오동기가 여수 14연대에 부임한 날짜는 대략 1948년 7월 15일이고, 체포된 날짜가 9월 28일이다. 여순사건 발발 20일 전에 오동기는 육군 본부에 체포되었다. 그렇다면 오동기에게 포섭된 하사관을 체포할 시간이 넉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일 동안 체포된 14연대 하사관이 전혀 없다. 단 한 사람(김영만)이 있지만, 이는 오동기와 관련이 없으므로 생략하겠다. 따라서 오동기가 하사관을 포섭했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셋째, 오동기와 최능진의 관계이다. 이를 설명하기에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오동기와 최능진이 공모한 사건을 ‘혁명의용군사건’이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혁명의용군사건은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정치조작사건이다. 국가폭력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정치조작을 통한 간첩단 사건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에 정국 혼란에 자주 등장했던 간첩단 사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넷째, 10월 혁명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이다. 10월 혁명기념일을 강조한 것은 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였다. 10월 19일 여수주둔 14연대 ‘반란’ 이외에 다른 지역에서는 어떠한 낌새도 없었다. 그런데 전국적인 기습 반란 중에 하나로 ‘여순사건’을 말하고 있다. ‘여순사건’을 과도하게 설명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승만 집권기에 두드러진 것은 자신과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여기기보다는 적(敵)으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정적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한 연유로 김구는 어떠한 증거도 없이 여순사건을 공모한 극우 인물로 내몰렸다. 혁명의용군사건과 여순사건을 하나로 묶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혁명의용군사건의 최능진도 이승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승만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여순사건은 처음부터 왜곡되어 일반인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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