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의 3.1운동과 소작쟁의

순천의 3.1운동

서울에서 일어난 3·1 만세시위는 1919년 5월에 이르러 전국 각지로 퍼져갔다. 순천에서는 천도교 순천교구의 김희로·강형무·문경홍 등이 독립선언서를 접하면서, 3·1운동이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6일 순천 예수교 청년회원 수백 명은 매곡동 난봉산에 모여 만세시위를 시도했다. 1919년 4월 7일 순천면 장날 상사출신의 박항래는 순천읍성 남문 연자루 위에서 조선독립을 외치다 체포되었다.

조직적인 만세운동

동초면(현 낙안면) 신기리와 낙안면 하송리에서는 조직적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신기리의 전평규는 안용갑·안응섭과 도란사라는 위친계를 조직하고, 별도로 2·8사를 조직했다. 그들은 한흥조의 집에 모여서 ‘대한독립기’라는 쓴 종이를 준비하고, 4월9일 벌교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2·8사 구성원은 1919년 4월 14일 벌교장터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했다.

낙안면 하송리 사람들은 고향출신 안호영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김종주와 유홍주가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1919년 4월13일 낙안면 장터에서 150여명의 시위 군중을 모아서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기>· <대한독립기>라고 쓴 2개의 대형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순천지역에서는 1919년 5월까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순천의 3·1운동은 “1919년 5월 31일 현재 집회횟수 6회, 참여인원 1,500명, 사망자 8명, 부상자 32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9년 말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의 기록에 따르면 순천의 3.1운동 관련 검거한 수는 58명이었다.

소작쟁의

일제는 자국의 만성적인 쌀부족 상황을 타개하고자 식민지 지주제를 구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식민지 지주제는 한국농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켜, 농업수탈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결과 한국 농민의 80%가 농지를 상실하거나 경작권을 잃게 되어 소작인으로 급속히 전락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 농민은 1920년대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서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1920년대 전반기 전국 소작쟁의의 1/3이 전라남도에서 발생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쟁의가 순천에서 일어났다. 순천소작쟁의(1922년 12월 발생)는 진주군(1922년 9월 발생), 무안군(1923년 12월 발생) 쟁의와 더불어 전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일제하 소작농민들의 투쟁이었다.

순천 소작쟁의의 시작

1922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순천지역 전체 논 중 65%를 소작인이 경작했다. 그 해 12월부터 순천지역에서는 소작인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순천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박병두·이명민·이창수·김기수 등은 1922년 남선농민회연맹을 결성하고 순천·여수·광양·보성지역에서 농민운동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박병두(1883~1936)는 조선공산당 순천지역 책임자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두 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농민운동을 주도하다가 1936년 거듭된 옥고와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큰아들도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다 55세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아들은 경찰생활을 하다가 좌익투쟁가로 변신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그러자 셋째 아들과 남은 가족들은 순천을 떠나 행적을 감추었다. 정부는 사회주의 활동을 문제 삼아 공적을 인정하지 않다가 2005년에 가서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병두(1883~1936)는 조선공산당 순천지역 책임자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두 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농민운동을 주도하다가 1936년 거듭된 옥고와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큰아들도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다 55세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아들은 경찰생활을 하다가 좌익투쟁가로 변신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그러자 셋째 아들과 남은 가족들은 순천을 떠나 행적을 감추었다. 정부는 사회주의 활동을 문제 삼아 공적을 인정하지 않다가 2005년에 가서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순천에서 소작쟁의가 맨 먼저 발발한 곳은 서면이었다. 1922년 12월13일, 서면에서는 박병두가 앞장서서 1,600명의 농민들과 집회를 개최하고 8개 항목의 소작관계를 개선해 줄 것을 군청에 요구했다. 또 쌍암면 농민 1,000여 명도 그해 12월 20일 농민대회를 개최했다. 농민대회가 채택한 결의는 소작료 4할제 실시, 소작권이동 반대, 지세공과금 지주부담 등의 내용이었다.

1923년이 되자 농민들은 순천군의 모든 면에서 마을별 총회를 개최하고 전면적인 투쟁의 준비를 갖추어나갔다. 소작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1923년 1월 순천군청은 군내 지주들과 소작인 대표와의 중재에 나서 소작인들의 요구를 대체로 수용해가기로 합의를 모았다.

지주들이 소작인에게 양보를 선언한 기사. 동아일보 1923. 1. 27. 자
지주들이 소작인에게 양보를 선언한 기사. 동아일보 1923. 1. 27. 자

전국 최초로 소작료 4할 관철

‘소작료를 4할로 낮추기로 합의했다’는 순천지역 소식은 인접한 군으로 퍼져나갔고 전국적인 소작쟁의의 공통 요구사항이 되었다.

1923년 2월 순천의 농민대표 68명은 순천농민대회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농민들은 지주 대신 납부한 토지세와 공과금을 돌려받고자 하는 ‘지세반환투쟁’을 결의했다. 하지만 일부 지주들은 지난해에 소작인이 납부한 세금을 돌려주기는커녕 신년도 세금마저도 강제 징수하고자 하였다. 또 면서기나 마름을 동원하여 지세를 내지 않으면 소작권을 뺏겠다고 협박하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단위 조직이 활발했던 쌍암, 별량, 주암, 낙안면 등지에서는 지세반환투쟁이 잘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시 순천청년회에 소속했던 청년지주들은 농민들에게 협조적이었으며 순천군청 또한 비협조적인 지주들에게 경고문을 보내기도 했다. 지세반환투쟁이 성과를 거두자 순천농민연합회는 여세를 몰아 ‘소작권이동 반대투쟁’을 시작했다.

순천면과 쌍암면에서는 소작권을 옮기려는 지주들에 맞서 공동이양을 했다. 황전면의 농민100여명도 소작권을 박탈당하자 공동으로 묘포를 만들고 파종을 했다. 농민들이 공동경작으로 버티자 김학모·김회산·조용현 등 악질지주들은 순천·고흥·보성 3군연합지주회의를 개최하고 반격에 나섰다. 또한 전남도내 지주들을 모아 ‘전남흥농회’를 구성한 뒤 ‘지주에 대항하는 소작인 단체의 해산’, ‘소작인이 아닌 자가 쟁의를 선동하는 행위를 단속할 것’ 등을 전남도와 경찰에 요구하였다.

급기야 순천·고흥·보성의 지주들은 1923년 10월 순천군의 중재로 약속한 ‘소작료 4할제’를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순천농민연합회는 ‘악독 지주에 맞서 소작료 불납동맹’을 조직하기로 하고, 순회강연을 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1924년 각 면단위 농민대회를 시작으로 소작쟁의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대다수의 지주들은 약속을 이행하는 태도를 보였다. 조직력이 강했던 해룡면에서는 소작료 4할을 관철한 이후에 소작료 3할 관철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해룡면의 용두 소작인동맹회는 일본인 지주의 소작료를 올리자 소작료 불납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신문에는 <지주 각성>, <4할 지주 증가> 등 ‘소작료 4할제’가 사실상 관철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공동경작 투쟁

1924년 봄 농사철이 다가오자 순천에서 900여건의 소작권 분쟁이 발생했다. 순천농민연합회는 분쟁지역에서 집회를 개최한 후, 교섭위원을 선정한 뒤, 해당 지주와 마름을 만나 소작권 갈등을 해결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원상회복되거나 타협으로 원만히 처리된 소작권이 850건에 달할 정도로 조직적 대응의 성과는 매우 컸다. 하지만 김학모·박승봉·김학순·낙안향교 등은 농민연합회의 중재를 거부하고 소작권 이동을 강행했다.

농민들은 해당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하는 투쟁으로 맞섰다. 순천면에서는 투쟁을 독려하던 농민회 간부가 구속되었으며, 황전면에서는 농민조직원들의 소작권을 모두 빼앗아 옮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져 신·구소작인 사이에 격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무렵 일제는 산림보호를 이유로 농민들이 퇴비마련을 위해 베어왔던 삼림채벌을 금지했다. 농민연합회는 ‘절초동맹(折草同盟)’을 조직하여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군청의 삼림계에서는 농민들이 한패거리로 여럿이 산에 출입하며 풀을 베어와 공동퇴비장을 만드는 것을 지켜만 볼 뿐, 단속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순천의 농민연합회는 강력한 조직력을 발휘했다.

이영민(1881~1962)은 1906년 순천에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 퇴치활동을 펴다가 1917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귀국 후 순천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청년회와 농민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한편으로 우석 김종익(1886~1937)과 함께 조선 판소리계가 일제하에서 명맥을 이어가도록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했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감시에 시달리다 순천을 떠나서 은둔했다. 1960년 병세가 악화되자 고향 순천으로 돌아와 1964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활동이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국가유공자 신청을 두 차례나 반려했다.
이영민(1881~1962)은 1906년 순천에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 퇴치활동을 펴다가 1917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귀국 후 순천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청년회와 농민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한편으로 우석 김종익(1886~1937)과 함께 조선 판소리계가 일제하에서 명맥을 이어가도록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했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감시에 시달리다 순천을 떠나서 은둔했다. 1960년 병세가 악화되자 고향 순천으로 돌아와 1964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활동이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국가유공자 신청을 두 차례나 반려했다.

지주들의 대응과 검거선풍

농민들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지주들과 군청 및 경찰은 전면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1924년 여름 순천경찰서는 절초동맹의 회장을 검거하고, 참여한 농민들에게 불법행위를 묻는 진술서를 받았다. 이를 근거로 7월 28일 농민연합회를 이끌어왔던 혁신청년들인 박병두·이영민·이창수·김기수를 불법선동 혐의로 검거하고, 공동경작투쟁을 주도한 각 면조직 간부들을 검거했다. 이렇게 체포한 수가 142명에 달했는데, 선고공판은 이듬해 1925년 봄에 이루어져 이들이 수감된 동안 농민운동은 주춤해졌다.

이 틈을 노려 악덕 지주들은 밉보인 농민들의 소작권을 박탈하고, 다시 토지세를 강제 징수하는 횡포를 부렸으며, 분쟁이 발생하면 경찰은 지주의 편을 들어 주었다. 1925년 1월 순천군에는 22개의 농민단체가 있었으나 주요 간부들의 구속으로 각 면단위 기초 농민조직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조선에서 쌀을 수탈해가는 일제의 농민지배정책이 한층 강화되어가자 자작농들도 농민운동에 가담했다. 1926년부터 전국적으로 소작인조합은 자작농민들도 참여하는 대중적인 ‘농민조합’으로 바뀌는 양상을 띠었다, 순천농민연합회도 1929년 순천농민조합으로 개편되었다.

‘순천소작쟁의’를 모르는 순천사람들

순천의 소작쟁의는 소작료 4할 관철투쟁에 승리하면서 1926년까지 지세반환투쟁, 공동경작투쟁, 절초동맹 등 조직적인 항일농민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때문에 전국적으로 일제하 소작쟁의가 치열했던 곳에는 크고 작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당시 소작쟁의의 효시가 되었던 순천에는 그 현장을 알리는 표석하나 없다.

해방이후 남북한이 분단되면서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의 공로는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더욱이 우리고장은 여순 10·19사건의 상처가 더해져 속칭 ‘반란의 고장’이라 불리어지며 구한말부터 이어져 온 항쟁의 역사도 감추고자 하는 피해의식이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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