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채열 전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의 순천시사 기고글을 나누어 지면에 연재한다. [편집자주]

고려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고을 수령과 양반가들은 무속·불교적 제사를 배격하고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향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우에 모시는 인물은 그 지역 출신 중에서 공이 있거나 절개·효행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 혹은 귀양 온 유명한 신하이거나 충의지사들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들어 사우의 설립을 장려하였다. 또한 교육기관으로 성균관과 향교를 설립하여 유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였는데 15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공교육은 점차 쇠퇴하고 사학이 대두되었다. 사교육의 대표적인 기관은 서원으로 학덕을 겸비한 유력 인사들이 앞장서면서 도처에 생겨났다. 이 시기의 서원은 성리학을 가르치는 교육기능 외에도 선현을 모시고 제사하는 기능이 있었다. 서원의 영향력이 커지자 제사만 모시던 사우도 점차 교육기능을 겸하는 곳이 생겨났고, 서원과 사우가 같이 있는 경우 서원으로 통징되었다. 

순천의 서원에는 충의지사가 왜 그리 많을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우추죽순처럼 설립된 서원은 향촌 지배기구가 되었으며, 지방 사족들이 중앙정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양반가의 자제들은 배향된 인물을 모범으로 삼고, 성리학을 배우며 학파를 이루고 계승했다. 따라서 서원에 모셔진 선현들은 그 지역의 정치적 정서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림문화로 형성되었다.

그러면 순천지역의 서원과 사우에 모셔진 인물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지역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순천의 서원과 사우에 배향된 인물들은 전란 중, 특히 임진·정유왜란에 참전하여 충절한 인물들이 매우 많다. 이는 당시 치열한 전투지였던 진주성이 소재한 진주지역보다 많으며, 서원의 건립이 가장 활발했던 경상도 안동지역과 비교하면 충의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도드라진다.  서원과 사우의 건립은 주도세력의 영향력 못지않게 지역민들의 찬성 분위기가 뒤따라야 성사될 수 있었다. 따라서 배향된 인물의 성격은 자연스레 그 지역의 학문적 기풍과 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끼쳐왔다. 순천지역의 경우 ‘충의지사’를 배향한 곳이 매우 많았고, 이러한 기풍은 역사적 격변기에 충절과 의기를 중시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훗날의 역사에서 순천의 후손들은 농민항쟁의 시대와 동학혁명을 거쳐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해방 후 정치상황에서 굽힘 없는 시대정신을 보여주었다. 

겸천서원(謙川書院), 세조에 대항한 인물들 

주암면에 있는 겸천서원은 조유, 조승문, 조철산 등 옥천 조씨(趙氏) 3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11년(숙종37)에 건립되었다. 그후 언제부터인가 순천이 관향(본관)이면서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된 김종서, 박중림, 박팽년도 함께 모셨다. 

겸천서원
겸천서원

조유는 고려 말 고위 관직에 올랐으나 조선 왕조가 열리자 낙향하여 순창에서 은거하다 주암으로 이주했다. 조유의 둘째 아들 조승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고모부로서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그의 아들 조철산 역시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았다. 

순천 김씨(金氏)로 알려진 김종서는 어린 단종을 보필하는 기둥역할을 하는 원로대신으로서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최우선으로 제거한 인물이었다. 순천 박씨(朴氏)로 알려진 박중림과 박팽년은 부자지간으로서 두 사람은 모두 집현전 학사출신으로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죽임을 당했다.  

수양대군이 벌인 계유정난은 그의 후손들이 왕권을 이어가게 되자 250여 년 간 금기의 역사로 묻혀 졌다. 그 세월 동안 단종복위에 목숨을 걸었던 인물들의 가문은 쑥대밭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순천 박씨’가 ‘뭇골 박씨’로 바뀐 사연이 있다.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는 아들을 노비의 자식과 바꾸어 이름을 비(婢 노비 비)라고 짓고 도망가게 했는데, 그로부터 살아남은 후손들은 본관을 숨기고 터를 잡은 곳의 지명을 따 ‘뭇골 박씨’라 칭했다. 

단종복위에 연루된 이들의 명예회복은 1711년에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호남의 선비들은 1706년부터 겸천서원의 건립을 건의해왔다. 이는 우리 고장이 단종복위를 주도한 인물들과 연관이 깊으며, 충절과 의기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 계유정란, 세조의 왕위찬탈

조선 초 세종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2년여 만에 숨을 거두며 원로대신들에게 어린 세자를 잘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때 왕위에 오른 단종의 나이는 불과 12세였다.  

1453년(단종1) 계유년 10월, 세종의 둘째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원로대신인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하여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반대파들을 제거해갔다. 1455년 6월, 수양대군은 추종세력인 정인지·신숙주 등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어 왕위(조선7대왕 세조)에 올랐다. 그에 따라 단종은 1457년 강원도 영월로 유폐되어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치게 되었다. 

세조의 왕위찬탈은 과거 세종·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출신의 문관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라 불리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 등과 무관인 유응부·성승 등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장에서 세조를 제거하려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이들의 거사는 불발로 그치고 주동자인 사육신과 그외 연루자 70여 명이 모두 처형되면서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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