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 100주년을 지낸 지 벌써 4년이 지나간다. 100주년이 되던 2019년에 낙안읍성 입구 3.1운동기념탑 주변을 독립공원으로 잘 꾸몄다. 순천여고 역사동아리가 원도심 지역 독립운동가 생가에 표지판을 세워달라고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여 순천 전역 독립운동가 생가나 마을에 표지판 24개를 세웠다. 흉가가 되어버릴뻔 한 조경한 생가를 말끔하게 복원도 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

현대 국가보훈처가 운영하는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유공자정보>를 검색해서 찾은 우리 지역 독립운동가는 모두 63명이다. 하지만 이것도 순수 ‘순천’으로 검색된 분은 59분. 승주군이 없어졌는데도, 독립운동가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순천군이라 했는데도 승주로 되어 있는 분이 2명이나 된다. 순천에서 국회의원까지 지낸 김양수 지사는 서울 출신이다. ‘순천 초천 덕산’으로 주소지가 나온 분이 있어 살폈더니 ‘보성 벌교 호산’이다.

재판장의 사실 심리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목포 남녀 학생에 순천 김나열 지사도 있었다. 매일신보 1922. 3 . 2. 자
재판장의 사실 심리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목포 남녀 학생에 순천 김나열 지사도 있었다. 매일신보 1922. 3 . 2. 자

순천의 독립운동가 63명 중 23분이 낙안 3.1운동 서훈자들이다. 낙안의 3.1운동은 정말 격렬했다. 근래에 한국학호남진흥원에서 펴낸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이라는 책에 ‘주일 대사관 발견 과거사 명부’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전쟁 중인 1952년에 급하게 조사했다고 하는데 남한 지역 희생자가 630명 중 전남 희생자는 81명이다. 전남 희생자 중 시군이 파악되는 분 26명 중 승주가 7명인데. 4월 13일, 14일 벌교시장에서 총살당했다고 나온다. 사망 내용에 일부 오류도 있지만 총을 쏘지 않으면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음을 보여준다. 일부 시위대가 체포당하자 헌병대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날 저녁에는 봉화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개된 낙안 3·1운동의 실상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돌이켜볼 일이다.

지역의 독립운동가로 그나마 선양되고 있는 분은 박항래 지사와 조경한 지사 정도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한옥글방 자리에서 태어나신 성동준 지사가 알려지고 있다. 표지판 덕분이다. 성동준 지사의 경우 전라남도교육청 본관 앞에 흉상을 만들어 기리고 있다. 역대 전라남도 교육감 중에서 독립운동가 이력을 가진 분으로 유일하다.

원도심 안에는 광주와 목포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한 순천의 낭자들이 있었다. 그중 김나열 지사는 1921년 목포정명여학교에 유학 중에 14살의 나이에 만세 시위에 나섰다가 징역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2012년 국가 보훈처가 발굴하여 포상하였는데, 지사의 딸 장경희(74) 씨는 “어머니는 생전에 유공자 신청 얘기만 나와도 ‘조선 사람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극구 거절했다”고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감동이지만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영동 110번지에는 표지판도 없다.

원도심 문화의 거리에는 순천의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청년운동을 주도했던 박영진의 자취도 있었다. 청년회 강론부장, 청년회 강습소 교사, 노동야학을 세웠던 그는 1935년 징역 2년을 선고받았을 때 맨 먼저 언급된 핵심 운동가였다. 하지만 이분의 행적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있다. 하긴 행적이 뚜렷한 판소리 순천가 작사가 이영민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독립운동을 했던 선열들에게 면목이 없다.

4월 7일 박항래 의사의 시위 이전인 3월 13일(추정)에 순천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4월 7일 박항래 의사의 시위 이전인 3월 13일(추정)에 순천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순천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동부 6군의 중심지 순천을 무대로 겨레의 자주독립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이들을 찾아내서 기린다면 순천의 인물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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