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순천을 《의향(義鄕)과 예향(禮鄕)의 고장》이라 하였다. 국난을 당해서는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충의 지사의 고장이며 또한 판소리 등 예술이 성행했던 사람 사는 고장이다. 풍속은 화려하며 의협심은 남다른 고장이다. 본 글을 읽으면서 순천을 이해하고 순천인의 자부심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_신근홍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상임이사

성황신 김총(金惣)

1618년(광해군10) 이수광 순천부사가 편찬한 『승평지』에는 김총이 상주에서 태어나, 여수 등 서남해 방위의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고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을 섬겨 관직이 인가별감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총은 순천김씨의 시조로 모셔지는 인물로서 여수반도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는 통일신라 헌안왕(857~861) 때 여수 진례산(영취산)아래 주둔하며 남해에서 날뛰는 왜적들을 정벌하고 그 공으로 순천지역을 다스리는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성황신 김총 영정

견훤은 신라 말 순천과 광양 일대에서 서남해의 방위를 맡아 군사 활동을 하던 중 김총을 만나 동고동락하게 되었다. 훗날 견훤은 순천의 대호족인 김총과 박영규의 지지를 얻어 신라에 반기(叛旗)를 들고 후백제를 창건했다.

김총과 박영규는 전남동부지역 호족들이 봉기에 참여토록 함으로써 견훤이 무주와 전주를 점령하고 공주까지 세를 넓혀 후백제를 창업할 수 있도록 힘을 실었다.

김총은 죽어서 진례산 성황신으로 추앙되었다. 『강남악부』에 후손들이 진례산 사당에서 1784년 무렵에도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주암면에는 김총 영정을 모신 영당과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해룡산신 박영규(朴英規)

『강남악부』에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로서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자 태조 왕건에게 협력하여 좌승의 벼슬을 얻었으며. 죽어서 해룡산 산신이 되었고, 순천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해룡산성 터

박영규는 신라 말 고려 초 해룡산 아래 조양포(홍내동에 있던 포구, 옛 명칭은 사비포)를 근거지로 해상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대호족으로 성장하였고, 순천지역의 군장(君長)으로 군림한 인물이다.

박영규는 견훤이 순천에서 신라의 방수군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끈끈한 연고를 맺어 견훤의 거병에 가담하였고 전남동부지역 호족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견훤은 순천에서 박영규와 김총 등과 연합함으로써 무주 동남지역을 후백제의 확고한 영역으로 확보했다. 박영규는 936년(태조19) 신검의 정변(政變)에 반발하여 견훤과 함께 고려에 귀부했다. 고려가 개국된 후, 박영규의 두 아들은 중앙정계에서 상당한 지위를 얻었고, 박영규의 세 딸은 각각 왕건의 부인(동산원부인)과 정종의 왕후(문공왕후·문성왕후)에 봉해졌다. 박영규는 죽은 후에 순천지역의 해룡산신으로 추앙받았다.

해룡산신이 물리친 왜구 그림

인제산신 박난봉(朴蘭鳳)

『승평지』에 박난봉은 순천의 군장이었으며 그의 공적을 기려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평양=순천지방을 부르던 별칭)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난봉은 순천박씨의 시조인 박영규의 후손이라 일컬어진다. 고려 후기에 인제산에 성을 쌓고 왜구의 침입을 막았으며, 죽은 후에는 고을을 지키는 인제산신으로 추앙받았다.

박난봉이 활동했던 시기는 몽골의 4차 침입 때로 추정된다. 아모간이 이끄는 몽골군은 1247년(고종34)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박난봉은 이때 산성을 쌓고, 지역민들과 몽골군에 대항했다고 추정된다.

박난봉이 축성했다는 인제산성(옛 이름은 건달산성(建達山城)은 삼국시대에 쌓은 태뫼식 산성이며 난봉산성 역시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각각 조사되었다. 하지만 이 산들에는 박난봉 장군과 관련된 여러 설화가 전하고 있어 박난봉 장군이 왜적에 대항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고 여겨진다.

순천에는 박난봉 장군의 설화가 많다. “인제산에 용마발터가 있는데, 박장군이 탔던 말의 발자국이다.”, “박난봉 장군이 던진 도끼가 떨어진 자리에 소(沼)[웅덩이]가 생겼다”, 또 난봉산에 아직도 정령이 있어 구름 끼고 비오는 날이면 병마 달리는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백성들은 왜 호족들을 산신으로 받들었을까? 

순천지역에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들이 향촌 공동체의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지역 향리들과 후손들은 산사에서 이들의 제사를 주관했다. 순천김씨 시조인 김총의 성황사와 순천박씨 시조인 해룡산사, 순천박씨 중시조인 박난봉의 인제산사가 그곳이다.

순천은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남해안에 위치했다. 따라서 이 지방에 왜적의 침입이 빈번했던 시기에 지역민들은 지방의 호족들에게 생명과 재산을 의지해야 했다. 자연스레 공적이 컸던 인물들의 능력을 신격화하여 정신적으로 결집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