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채열 전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의 순천시사 기고글을 나누어 지면에 연재한다. [편집자주]

낙안읍성을 축조한 김빈길(金贇吉) 장군

조선 초기에도 경상도·전라도 해안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서남해안을 지키는 낙안군 옥산 태생의 김빈길(1369~4105)이 있었다. 

김빈길은 1394년(태조3) 왜구가 침입하자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멸악산 아래서 왜구를 무찌르고 남해와 사천 앞바다까지 추격하여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김빈길은 왜구와 맞서기 위해 1397년 사재를 털어 군민들과 함께 낙안읍성을 흙으로 쌓았다. 그가 맨 처음 축성했던 낙안읍성은 1426년(세종6)에 석성으로 증축했으며, 군수 임경업 장군에 의해 개축되었다.

김빈길은 전라도 수군도절제사로 임명되어 1405년(태종5)에 남해안의 요소요소에 군사와 병선을 배치시키고 왜적의 침입을 막았다. 항상 맨 앞에 서서 싸우고, 군사들과 동고동락하니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한다.

김빈길은 말년에 고향에 정자를 짓고 낙안의 풍광을 노래한 ‘낙안팔경’(樂安八景)’이란 시를 남겼다. 노년에는 전북 고창으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그곳에 왜구가 침입하자 흥덕 사진포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고 죽었다. 태조는 그의 죽음에 슬퍼하며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김빈길 장군 동상
김빈길 장군 동상

『조선왕조실록』에 김빈길에 대한 14건의 기록이 있다. 왕이 아닌 신하의 행적을 이처럼 상세히 남기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이 막 개국하여 서남해까지 국력이 미치지 못했던 시기에 스스로 일어서 왜적을 물리쳐 온 김빈길의 공적에 대한 답례라 할 것이다. 


■ 고려말 조선초 왜구의 침탈

한반도를 통치하던 왕조가 바뀌던 혼란기를 틈타 왜구의 침탈이 사나워졌다. 왜구의 출몰기록은 1350년(충정왕 2)년을 시작으로, 뒤이은 공민왕 때에는 115회, 우왕대(1375~88)에는 278회로 점점 악화되었다. 이 시기 왜구는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몰려오는 등 그 규모도 커졌고, 노략질하는 지역도 평안도·함경도 등 전국에 걸쳤다. 또한 남부 해안을 거쳐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여 개경을 위협하기도 했다. 왜구의 약탈로 입은 인명과 재산피해는 막대했으며, 왕권이 추락하여 고려가 멸망한 주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남해안 왜적방비의 거점 순천부읍성 

순천은 예부터 전라동부권의 행정과 군사중심지였다. 순천성은 고려말기에 해안과 가까운 곳에 축조된 여러 읍성 중 하나였으며, 남해안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 방어의 거점이었다. 석성으로서 모습을 제대로 갖춘 것은 조선시대 1430년(세종12)에 이르러서이다. 읍성을 쌓은 이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함경도 변방에 4군 6진을 개척한 최윤덕 장군이다. 

성벽의 총 둘레는 1,580m, 높이는 5.6m 정도이다. 내부시설로는 우물 4개소, 못 8개소, 아사, 객사, 내아, 창고, 군기고, 형청, 옥사 등이 있었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설치했다.

순천부읍성 지승지도. 18세기 후반.
순천부읍성 지승지도. 18세기 후반.

순천부 관아의 행정권역은 매우 넓었다. 순천부는 1413년(태종13)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고, 15세기 말에는 여수현, 돌산현, 부유현 및 다수의 향, 소, 부곡 등을 직접 다스렸으며, 1598년(선조31)에는 광양현을 병합하였다.  

군사적으로는 1437년(세종19) 순천도호부에 진(鎭)이 설치되면서 그 산하에 낙안, 보성, 광양, 고흥, 능주, 동복, 화순, 구례를 묶어 순천부사에게 군사지휘권인 병마절도사까지 겸하도록 하여 해상은 물론 육상까지 방비하는 역할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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