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지는 기획시리즈 ‘순천 청년들이 사는 진솔한 이야기’(청사진)를 연재한다. 순천에 사는 청년, 순천을 떠난 청년, 순천으로 온 청년들을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싣는다. 여덟번째로 청년귀농인인 한진희(33) 씨를 지난 21일 인터뷰했다.

취미는 녹색

광교 신도시가 개발되기 이전 수원, 한진희 씨의 유년시절 일과는 쪽대 들고 물고기 잡으러 다니는 것이었다. 가재도 잡고, 거미도 잡고, 비료 포대로 눈썰매도 탔다고 말하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한진희 씨는 2020년 수원에서 벌교로, 21년 ‘순천형맥가이버정착지원사업’에 지원하면서 벌교에서 순천 외서면으로 이주했다. 수도권을 떠나 지역으로 온 때가 서른 살, 고등학생 때부터 ‘언젠가 흙을 만지면서 살아야지’ 다짐했지만 이렇게 빨리 실현될 줄은 몰랐다.

“순천으로 온 가장 큰 이유는, 작당 모의를 할 수 있는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있었던 게 커요. 그리고 도시랑 시골이 적절히 같이 있는 그런 것들, 교통도 편리하고요.”

마음 맞는 친구들이란 녹색당 당원들이었다. 한진희 씨는 수원에서 녹색당 활동가로 일했다. 2018년에는 수원시의원선거에 출마도 했다. 지금은 녹색당 전남도 사무처장직을 맡고 있다.

한진희 씨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유기농사를 짓는다.
한진희 씨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유기농사를 짓는다.

“녹색당 활동을 하면서 지역에 있는 당원들을 알게 된 거예요. 그전에는 내나 인근 지역, 서울 사람들만 알고 지냈었는데… 소신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또 당시 페이스북 같은 것들을 하면서 사진 등을 통해 그분들의 삶을 시각적으로 접하니까 저의 삶도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지더라고요. ‘나도 이렇게 살 수 있겠구나’, ‘꼭 나이 들어서 (지역에) 가는 것은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생각으로 수원 광교산 벼농사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었는데, 불현듯 ‘나 10년 뒤에도 이렇게 살고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지금 실행하지 않으면 10년 뒤에도 도시에서 바쁘게 쳇바퀴를 달리고 있을 것 같았어요.”

지역을 지키고 지구를 지키는, 나를 지키는 소농

한진희 씨는 유기 농사를 짓고 있다. ‘지구에 덜 해롭게’ 생산하고 싶기 때문이다. 제초제, 살생제는 물론 멀칭비닐도 사용하지 않는다. 감자, 쌀, 대마, 콩 등이 주소득 작물이고 상추, 생강, 땅콩, 옥수수 등을 소규모로 경작한다. 지난해에는 꿀벌에 사랑을 쏟았다.

일반 사람들은 귀농했다고 하면 지원금 많이 받는 줄 알지만 대부분 융자, 즉 빚을 내는 것이다. 이마저도 대농, 스마트팜 위주가 대부분이다. 한진희 씨처럼 지구에 덜 해로운 농사를 짓고 다양성을 지키는 소농들은 당장 먹고사는 일이 걱정이다. 소농은 단지 농산물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농촌 마을을 지키고 땅을 건강하게 가꾼다. 한진희 씨는 지자체에서 ‘지역을 지키고 지구를 지키는’ 소농에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기를 희망한다. 이 작은 나라에서 농산물을 쥐어짜듯 생산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면, 아이들이 장래희망에 ‘농부’를 적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농사만 지으면서 살고 싶은데 농사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생활을 메꿔 나가는 것이 가끔은 서글프다”라고 말하는 그는 평일 오전에 ‘생활지원사’로 마을 어르신의 안부를 살피고 말벗을 해 드리고 있다.

생활지원사로 활동하는 청년귀농인 한진희 씨와 마을 할머니
생활지원사로 활동하는 청년귀농인 한진희 씨와 마을 할머니

한진희 씨는 순천시 귀농정책에도 관심이 많다. 10년, 20년 뒤 어르신들이 거의 돌아가시면 이 마을에 누가 남아 있을까 걱정이다.

“외서면 인구가 작년에 비해 올해 100명 정도 빠졌더라고요. 저도 지금 사는 집 계약이 끝나면 어떡할지 막막해요. 그 이후에 살 집들을 알아보고 있지만, 어르신들이 집을 잘 안 파시잖아요. 저같이 이미 마을에 사는 사람도 빈집 구하기 힘든데 살아볼까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어려운 거죠. 답답해서 순천시청 귀농귀촌 팀에 연락을 하고 직접 찾아가서 얘기한 적도 있어요. ‘전남에서 살아보기’, ‘맥가이버지원사업’, ‘귀농인의 집’ 등의 사업이 이미 있지만, 사람들이 농촌 체험에 그치지 않고 정착할 수 있도록 시에서 적극 나섰으면 좋겠어요.”

농촌에서 마주한 여러 어려움에 귀농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노파심이 일었다.

“좋은 게 많아서 상쇄가 돼요. 지금은 계절이 지나가는 걸 알면서 살잖아요. 이전에는 철없이, 그러니까 철을 모르고 살았던 거죠. 아스팔트 속 네모나고 빡빡한 빌딩 숲에서 지내다가 초록초록한 자연을 보니 정말 좋아요. 농사는 생명을 늘 가까이에 두는 거잖아요. 이 자체가 큰 행복인 것 같아요.

또 일상의 긴장감,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엄청나게 줄었어요. 육체노동을 하면 정신이 간결해지고 명료해지는 느낌이에요.”

어르신이 대부분인 농촌 마을에서 또래 친구, 젊은이 문화에 대한 갈증은 코로나19로 줌 등을 이용한 화상 모임이 활성화된 것이 아쉬운 대로 돌파구가 됐다. 또 조성과 벌교 등지에 사는 도예가, 직조하는 사람, 그림책 작가, 풍물하는 사람 등과 함께 서로의 재능을 나누며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농촌을 떠돌고 있다 - 비닐이라는 유령이.’

“너덜너덜한 비닐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걸 보면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가 연상돼요.”

“너덜너덜한 비닐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걸 보면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가 연상돼요.”
“너덜너덜한 비닐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걸 보면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가 연상돼요.”

한진희 씨는 비닐 쓰레기가 수거되지 않고 땅에 묻히거나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농촌 쓰레기 문제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자신은 쓰지도 않은 폐비닐을 치우는 것도 한두 번,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비닐 쓰레기를 바라보는데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유레카!

이웃 할매네 밭에서 폐비닐과 부직포를 얻어 마을 개울에 가볍게 헹구고, 너덜너덜한 비닐과 부직포를 이어 옷을 만들었다. 때마침 순천장안창작마당에 비닐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분이 거주 중이었고, 시민커뮤니티프로그램 ‘아트빌리지’를 통해 비닐 옷을 입고 퍼포먼스를 했다.

밭에서 태어난 비닐들을 생각하며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품에는 대파를 안았다.
밭에서 태어난 비닐들을 생각하며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품에는 대파를 안았다.

한진희 씨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시골살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농촌에 정착하고 문화를 형성하는 것을 돕는 ‘시골살이연구소’를 만들고 싶어요. 새로 오는 사람들한테 시골살이 해보니 이렇더라는 팁도 드리고, 귀농귀촌한 사람들이 만족하며 살 수 있도록 워크숍을 열어볼 수도 있고요. 마을에 이런 거 진짜 문제이지 않냐 같이 얘기해 볼 수도 있잖아요.

또 이주자에게뿐만 아니라 어르신들께도 젊은 사람들은 어르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드릴 수 있는 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한진희 씨는 생활지원사로 일하며 어르신들의 ‘눈물 없이 못 들을 이야기’들을 기록하여 ‘휘발되지 않도록’ 엮고 싶다고 했다. 여러 농기계를 직접 다루면서 여성 맞춤 농기계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늘에 있던 여성 농민들의 목소리에도 마음이 쓰인다고 말하는 천진한 그의 표정에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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