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그저 나이가 젊은 이를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다. 청년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젊은이는 만들어진 세상을 살며, 선배가 쌓은 경험을 학습한다. 젊은이의 학습이 어느 수준에 달하면 기로에 선다. 세상을 수용하거나,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거나. 그들이 만든 것은 그들만이 정의할 수 있고, 새로운 정의가 정착했을 때 세상은 넓어진다. 세상의 한계를 보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정의하는 자가 청년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눈으로는 청년을 찾을 수 없고, 청년은 스스로 청년임을 나타내야 세상에 드러난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서 붙여준 청년투성이다. 흔히 보이는 ‘청년 실업, 청년 빈곤, 청년 자살’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지금 청년의 의미는 젊은 사람일 뿐이다. ‘청년 정치인’이나 ‘청년 CEO’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로, 언뜻 보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열정 가득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는 세상을 대변하는 자이기에 세상의 지지를 받는다. 그저 세상과 같은 생각을 하는 젊은이일 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청년이 아니다.

청년들이 없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에 없었던 청년의 생각은 새롭기에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 두루뭉술하고 장황하며, 지지받지 못하거나 배척당한다. 결국 청년은 고립되고, 사회적 동물인 그들은 본능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괴로운 청년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세상에 순응한다. 한편 고도화된 사회는 젊은이들의 특성을 재빨리 파악하여 분석하고, 청년이 되고자 했던 젊은이는 자신을 대변하는 세상에 수긍하고 동화되어 버린다.

물론 새로운 것을 만들고 변화시키는 청년은 세상을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안정감과 생존을 위해 청년이 세상에 순응한다면, 청년도 세상도 허물을 벗지 못한 애벌레처럼 함께 죽어갈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예견되는 가운데 나는 청년으로서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다. 청년을 배척하고 부적응자로 만드는 세상 앞에 당당히 내 생각을 펼쳐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세상이 청년을 인정하게 만들 것이다. ‘지금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 테니까 말이다.’ 젊은이들이 이런 마음을 먹으며 아무리 괴로워도 청년성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청년의 경계선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말을 던지고 싶다.

“젊은이여 세상과 같아지지 말자. 세상이 위태로워지면 함께 위태로울 테니.”

김승건 순천YMCA와 GI.ANT 활동가
김승건 순천YMCA와 GI.ANT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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