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인류 역사상 어떤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위기 속으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다. 위기는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 전면적이고 매우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위기의 최전선에 있다. 그 위기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민주주의 심각한 후퇴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은 2021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을 주장하는 폭도들이 대중민주주의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주요 지지 기반은 미국에서 제조업이 쇠퇴하고 산업의 중심이 금융과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함에 따라 빈부 격차가 확대되면서 전통적인 중산층에서 탈락한 백인들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는 이들의 불만을 파고들면서 자국중심주의, 외국인과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 정보의 조작과 왜곡, 합리적인 토론을 통한 의사 결정보다는 선동과 이미지 정치 등의 수단을 통해 집권하고 집권 기간 내내 같은 방식을 유지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의 등장 및 전개 과정과 유사한 점이 많아 미국 사회의 극우화에 대한 우려를 낳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단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 국민전선의 후보가 결선 투표에 오르는 등 독일을 포함한 수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이민자 문제를 주요 이슈로 극우 정당들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권이 바뀌고 1년여 동안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후퇴하고 있다. 정치 초보자 윤석열의 집권은 트럼프의 그것처럼 갑작스럽기도 하지만 그의 어리숙한 언행은 트럼프보다 더 정치를 희극으로 보이게 했다.

그의 집권 배경에는 기존 정치권의 무능과 비효율, 저급한 궤변과 자기합리화 등의 정치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도 있겠지만 경제 성장의 정체에 따른 청년 실업과 심각한 빈부 격차, 부동산 가격 폭등 등 국민들의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하락한 데 따른 반사 작용이라 할 수 있겠고, 더불어 시민들이 합리적 사고와 비판 능력을 상실하고 감성적인 판단에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부는 정치 과정의 파트너들에 대한 철저한 배제와 탄압, 부자와 자본을 편드는 경제 정책, 노동자와 농민, 장애인, 일제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 정보의 조작과 왜곡 및 일부 언론을 통한 선전 등으로 극우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가까운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극우 성향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잉태한다. 새 정부는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론으로 북한의 핵 공격 위협을 자초하고 있다. 또 중국의 확장을 억제하려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적극 편승해 일본에 굴욕적인 외교 행태를 보이면서까지 한미일 군사 동맹의 하위파트너로 기꺼이 합류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공급하기로 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 전쟁에 직접 개입하는 당사국으로 지목됐다. 게다가 살얼음 같은 대립과 긴장이 흐르고 있는 대만해협 문제에 대해 미국 입장을 대변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중국 당국으로부터 모멸적인 반격을 받고 있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한미일 동맹의 한 축이면서 대규모 미군 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우리 국토가 전쟁터로 변할 것임은 뻔하다.

그것은 3차 세계대전 곧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로마 교황은 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 기축통화로서의 미 달러화의 지위가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기축통화라는 게 그 자체로 부정의이지만 세계 경제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고 유지해 왔는데, 지금 그 질서가 급속히 흔들리고 있다.

이는 해외 의존도가 심한 우리나라 경제에 매우 불리하고 불안정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인구 절벽에 따른 내수 시장의 축소와 활력의 소진, 포화 상태에 달한 세계 무역 시장, 신 냉전 체제에 따른 중국과 러시아 시장의 축소 등의 상황은 한국 경제가 이제 성장의 정점을 지나 장기적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장기적인 경제의 불황은 현대의 일본이나 2차대전 이전 독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회 전반에 우경화를 더욱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인간관계의 위기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되고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PC와 핸드폰의 대중화는 이 개인화 추세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람들은 유대 혹은 연대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전자기기라는 어두운 벽 뒤에서 숨어 벌거벗은 채로 보이지 않은 선을 통해 들어오는 신호를 세상으로 알고 맞아들이며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다시 발산한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봇물은 자신과 다르다고 느끼는 순간 날 선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고 갈등과 대립을 배양하는 온상이 된다. 온라인은 혐오의 바다이다. 차이는 다양성과 다원주의의 자원이 되지 못하고 그 자체로 차별화와 배척의 이유가 되고 있다.

다름이 있는 곳에 어김없이 갈등이 있다. 남북, 지역, 이념, 세대, 성, 계층 등등 그 층위를 헤아리기 어렵다. 세상에 자연이 부여한 생리적 차이로 구분된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향해 드러내놓고 으르렁거리는 사회가 또 있을까.

관계가 이렇게 불편한 짐이 되면서 사람들은 관계 맺기를 거부한다. 격렬한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집안으로 숨어들어 스스로를 소멸시키거나 불특정 다수를 향해 폭력을 행사한다.

변태적인 일탈 행위로나마 자신을 확인하려는 사건들은 이제 예삿일이 되었다. 젊은 남녀는 결합해서 사회를 이루고 존속게 하는 세포로서 가족을 형성하기를 거부하고, 결혼한 많은 이들도 출산을 포기함으로써 2세와의 관계 맺기를 거부한다. 관계는 자신에 대한 기능으로 평가해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전제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전제가 갑자기 무너지고 있다.

위기의 세 번째 측면은 기후변화이다. 유엔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는 올해 초에 6차 종합보고서를 발표했다. 2014년에 발표한 5차 보고서에서 지구의 평균 기온이 2040년 이후에 산업혁명 이전 대비 1.5°C 오를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번 보고서에서는 그 시점을 10년이나 앞당겨 현재의 온실가스 배출 추세가 이어진다면 2030년 전후로 1.5°C 임계점에 도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인류가 어떤 노력을 해도 온난화 추세를 막을 수 없고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당 보고서는 작성 과정에서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신흥 산업 대국은 물론 거대 초국적기업의 압력과 로비로 위기의 절박성이 최대한 희석된 채로 나왔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현재 1.1°C∼1.2°C 상승한 상태이므로 임계점까지 여유는 겨우 0.3∼0.4°C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전에 활성화되기 시작하던 기후변화에 관한 각국의 논의와 노력들을 단숨에 집어 삼켜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4월 10일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탄녹위)가 2050년 탄소중립 국가 기본계획을 수립했는데, 그 골자는 2021년 계획에서 수립했던 산업 부문에서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대폭 줄여준 대신 아직 실용화되지 않은 탄소포집저장기술이나 기업의 해외 부문에서의 감축분을 늘린 것이다. 당시 탄녹위 회의장에는 IPCC보고서의 경우와 같이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요구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몰려들어 아우성이었다고 한다.

2021년 계획도 기온 상승을 억제하는 데는 턱없이 모자란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이번에 수정된 국가 계획은 기업에 대해 뼈를 깎는 노력을 촉구하고 강제하는 대신 현재의 생산 방식을 용인하겠다는 신호와 마찬가지다. 예견된 재앙과 파국은 정권에게는 임기 이후의 일이고, 기업으로서는 당장의 돈벌이 외에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위에서 제시한 위기 징후 외에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이라는 게 급속히 발전하면서 향후 인간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외국의 일부 선각자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 방면에 첨단을 걷고 있는 데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인문적으로 성찰하고 적절한 제한을 가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동양에서는 사고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했고. 서양에서는 호모 사피엔스라 불렀다. 보편 종교에서는 인간을 더욱 드높여,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 했고,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덕성)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사고하는 능력을 오로지 부를 쌓고 타인을 지배하는 일에만 활용함으로써 스스로 파국과 파멸을 향해 주저없이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인간에 대해 그처럼 영광스러운 칭호가 가당한 것인가. 인간은 다시 새롭게 규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 위기를 무엇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을까? 정치? 종교? 교육? 시민운동? 정치는 스스로 이익집단화해서 시민들에게 스트레스 유발을 넘어 발암물질이 되어가고 있고, 종교 또한 갈수록 세속화의 길로 들어서 세상에서 소금과 누룩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교육은 사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다리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시민운동은 시대의 변화에 맞춘 의제와 새로운 운동 방식을 개발하지 못한 채 자기 앞가림에 바쁜 젊은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소수나마 양식 있는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테고,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순천광장신문이 창간 10돌을 맞았다. 지방의 종이 신문이 존속하기에는 너무 척박한 환경 속에서 300여 조합원의 손으로 태어나고 여기까지 숨줄을 이어온 것이 대견하다. 그동안 신문을 지키고 애써주신 조합원, 제작진, 필진 모든 분께 감사와 경의를 드린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고 축하만 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아슬하게 변해가고 있고, 그에 비해 우리의 역할은 미약하기만 하다. 신문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닐진대,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지금이야말로 발본의 기획과 쇄신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역민들을 이어주며, 지역 정치가 부패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지역의 핵심적인 관심사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보도함으로써 나름대로 지역공동체를 살려 나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지방 신문들이 있다. 그들은 신문의 영향력을 바탕 삼아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개발하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모범 사례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더불어 그 신문의 취재와 편집 방향, 기사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우리 지역에 맞는 방식과 내용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신문의 외양 면에서 발행의 규모나 횟수가 신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갖출 필요가 있다. 사실 신문의 매주 발행은 창간 당시에 구독자와 조합원들에 대한 불문의 약속이었다. 우리는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비정상이 일상화되었다고 정상이 될 수는 없다. 취재를 포함해 신문의 제작 역량이 크게 확충되어야겠고, 조합은 재정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신문이 지역에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다면 달라진 매체 환경에 맞춰 온라인이나 유튜브 등 다양한 전달 방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콘텐츠도 더욱 풍부하고 다양해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지역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재창간 수준의 각오와 배전의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이 위기의 시대에 순천광장신문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김계수 전 순천언론협동조합 이사장
김계수 전 순천언론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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