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참 빠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벌써 매화가 피었다. 옷깃을 여미고 어깨를 움츠리며 싸늘한 바람을 미워하던 때는 이미 갔다. 밉고 싫은 게 찬바람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을까? 하늘을 올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뱉기 여러 번이었다.

세상은 더 빠르다. 높게 솟은 공장 굴뚝에서 품어 나오는 연기를 보며 흐뭇해하던 시대는 언젯적인지 생각도 안 난다. 다른 나라에서 수백 년 걸린 산업화를 한국은 50년도 안 걸려 이뤘다. 다시 탈산업 사회, 정보화 사회가 된 지도 이미 한참이다. 집단보다는 개인이, 생산보다는 소비가 중시되는 사회가 되었다. 사회관계의 중심도 예외가 아니다. 상명하복이 당연시되던 조직 중심이었다. 이제 대등한 주체의 관계인 네트워크가 중심이다.

네트워크 중심은 소통이 핵심이다. 소통의 전제는 상호 존재의 인정이다.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 필수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상대인 내가 먼저 나를 믿어야 한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소통하기는 심히 어렵다.

‘나에 대한 믿음’이란 글자 그대로 스스로 자, 믿을 신, 자신감이다. 허황된 자만심을 자신감이라 믿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본다. 나는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나와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내가 있다. 손과 발을 움직이거나 눈과 입을 여닫는 것은 내 마음대로다. 하지만 심장을 뛰게 하거나 냄새를 못 맡게 할 수는 없다. 마음 또한 둘이다. 저절로 일었다 사라지는 감정의 변화는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 애써 외면할 수는 있지만.

나는 아수라 백작이다. 몸의 한쪽은 여자, 다른 쪽은 남자인 아수라 백작. 음양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붙어있다. 하나가 아니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사람 모두가 그런 게 정상이다. 정상적인 사회는 다름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모두 다름의 조화, 이것이 사회다. 이를 위해 소통이 필요하고, 정치가 존재한다. 오늘날 정치는 어디 있는가. 정치 없이는 사회가 없다. 사회적 존재로서 나는 관계 속에서 산다.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말하기다.

지도자의 말하기는 정치,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천의 최고 지도자인 노관규 순천시장의 말하기는 순천시민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고 인정하여 서로 스며드는 방식인가? 지난 주말 순천만국가정원 화재 소식을 듣고 한 말은 이렇다. 노 시장은 “가슴이 철렁했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라며, “사람들 수준이 하두 어이가 없어 더 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전에는 ‘젓가락 정치’를 말하며, ‘내용도 모르고 여기저기서 숟가락까지 올리며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 또 “걱정은 태산이고 현장 가보면 천불 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내 경험상, 분노가 일고 천불이 나는 건 대개 ‘남 탓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후져서 그런다는 생각 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한 노 시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인이다. 순천 제일의, 최고의 정치인이다.

이정우 편집국장
이정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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