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문서들은 우리들의 손 밖에 놓여난 지 오래다. 육하원칙에 따른 정교한 서술들은 책장에서 먼지로, 과거의 복원은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들 내일을 예측하기 바쁜 와중 지난 한 해, 지역의 과거와 사람에 주목하는 2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순천의 기록자들』, 그리고 『예술인순천』을 집필한 양진석 작가를 만났다.

양진석 작가는 순천기록문화포럼의 대표로 ‘1990 원도심 중앙동 아카이빙’ 작업에 이어, 순천시립도서관 지역자료 아카이브 워크숍과 시민기록활동가 양성 교육(순천문화재단 주관, 2022.06.)을 진행했다.

양진석 작가
양진석 작가

『순천의 기록자들』을 출간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더불어 『예술인순천』의 출판배경도 궁금합니다.

『순천의 기록자들』은 지역의 다양한 기록자들을 찾아 취재하여 쓴 책입니다. 지역사나 문화예술계의 개인 연구자뿐 아니라 순천광장신문, 그리고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의 기관지인 『지역과 전망』 등 순천의 현대사를 말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될 매체를 소개했습니다. 또한 여순사건의 기록을 시대적 책무로 받아들이며 봉사해 온 순천대학교 10‧19연구소와 토종씨앗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나누는 순천토종씨앗모임의 이야기도 청해 들었습니다. 이외에도 공공의 기록자로서 순천시립도서관과 순천시정자료관 등을 함께 다루었습니다.

『순천의 기록자들』이 순수한 개인 저작물이라면 『예술인순천(藝術人順天 ‧ 예술in순천)』은 2022년 순천시문화도시센터로부터 용역을 받아 수행한 ‘순천 문화예술인 아카이브’ 작업의 일환입니다. 순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 20명을 만나 그들의 예술과 정신을 구술채록했고, 책으로 펴냈습니다. 저마다 자기 세계가 뚜렷한 예술가들인 만큼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지만 보람도 컸고 많이 배웠던 기회였습니다. 예술가들도 이 경험을 각별하고 신선하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랫동안 각자의 작업을 해왔지만 이처럼 진지하게 본인의 예술세계를 짚어볼 수 있는 계기는 흔치 않았으며, 대화를 통해 새로운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고 이구동성이었습니다.

두 작업의 공통점이라면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는 점입니다. 각 분야를 탐구하고 천착하는 것은 여러 연구자나 예술가들의 일이고 저는 그들 자신, 즉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이 행동하게 된 배경과 의도, 맥락을 함께 찾아 기록해두면, 그것을 전달받는 자(시민 또는 후대)는 보다 깊고 복합적인 이해를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순천의 기록자들』은 지역의 다양한 기록자들을 찾아 취재하여 쓴 책이다.
『순천의 기록자들』은 지역의 다양한 기록자들을 찾아 취재하여 쓴 책이다.

지역의 기록문화와 지역 아카이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저는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이렇다 할 지역사 연구가도 못 됩니다. 다만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순천에서 발간되는 책들을 찾아보던 가운데 하나의 큰 문제의식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순천의 기록들이 잘 보존되거나 관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순천시 안에서 생산되는 공공의(혹은 사적이지만 순천시의 지원으로 만들어지는) 문헌과 기록물을 비롯해, 시민들의 손을 거쳐 발간되는 갖가지 책들, 나아가 순천을 다룬 아무개가 쓴 책과 순천출신 저자의 책들까지.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마땅히 잘 수집하고 분류, 보관하고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는데요.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대부분의 공무원과 문화예술계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현재 하고 있거나 곧 닥쳐올 일에만 관심이 쏠려 있지, 지나가버린 일을 굳이 기억 또는 기념하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 “지역을 기록하자. 기록물을 관리하자. 당장 서둘러 지역 아카이브를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습니다.

기록물 관리의 부실은 곧 경제적 낭비로 이어집니다. 지자체에서 기록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과거에 했던 사업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생깁니다. 반면 기록을 잘 관리하고 활용한다면 유사한 사업의 반복을 피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낫고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기록하여 남기고 물림하는 행위의 이유야 사회‧문화‧역사‧개인적으로 무수히 많겠으나, 이처럼 ‘낭비와 절약’의 문제로 설명하면 그나마 좀 더 쉽게 와 닿습니다. 공공기관들부터 더 이상 ‘사업을 위한 사업’을 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생산한 기록과 정보를 잘 모아서 활용하는 지혜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기록물 생산이 기득권에 한정되지 않고 일상의 기록자들, 즉 지역의 시민들도 참여할 것을 강조하셨는데요?

그렇습니다. 과거 문자와 기록은 권력자 등 지식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자와 권력이 제 입맛대로 서술한 역사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의 시민은 이미 누구나 SNS라는 개인 매체를 운영하는 훌륭한 기록자입니다. 시민 개인과 가족, 마을의 이야기들이 모여 오늘의 역사를 이룹니다. 공공의 역사만큼이나 개인 및 민간의 기록 또한 중요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배운 역사의 결락을 메꿔가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발견되는 과거 민간의 기록들이기도 합니다.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바로 시민입니다. 시민들 사이에서 ‘기록의 일상화’를 통해 기록문화가 확산하고, 자연스럽게 지역아카이브 활동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천의 기록자들』 후반부에는 ‘시민기록자 양성교육’에 쓸 교재를 집필해 덧붙여 놓았습니다.

교량마을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이야기는 『말똥이의 모험』이라는 동화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교량마을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이야기는 『말똥이의 모험』이라는 동화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앞으로 작가님의 기록작업에 시나 도의 지원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책지원을 제안하신다면?

아카이브 사업도 단체장의 취향과 의중 앞에 갈대와 같이 힘없는 존재입니다. 단체장이 지역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투자할 것이고, 아니라면 다음 선거 이후를 기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아주 기본적으로는 공청회나 포럼 등 행사를 통해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사단법인체를 만들어 ‘순천기록관’ 또는 ‘순천디지털아카이브’, ‘순천학연구소’ 등의 관련 사업을 지속적으로 담임하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거듭 말하자니 입이 아픕니다. 『순천의 기록자들』에도 써놓았고 어디서든 누누이 주장해왔던 말입니다.

‘시너지콘텐츠’라는 출판사를 운영하시는데, 독립출판이나 지역 문화콘텐츠 발굴이나 출판계획이 있는지요?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가공해내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순천의 문화라는 구슬 서 말을 잘 꿰어 보배로 만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혹자는 “순천은 작은 도시라 문화자원도, 이야깃거리도 부족하다. 써먹을 게 없다” 하는데,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어딘가 아직 발견 못한 이순신이나 홍길동 같이 화려하고 거대한 이야기가 남아있을 리 없을 뿐더러, 요즘은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소소하지만 감성적이고 독창적인 것이 먹히는 시대입니다. 유심히 둘러보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많습니다. 특별한 것을 발굴하고 만들어내는 시작은, 대상에 대한 진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극히 순천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어쩌다 보니 여기저기서 ‘기록자’로 소개되는 일이 잦아졌는데, 어디까지나 저의 정체성은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생계형 집필을 같이 해야 하는 처지라 당최 진도가 안 나갑니다.

『예술인순천(藝術人順天 ‧ 예술in순천)』은 2022년 순천시문화도시센터로부터 용역을 받아 수행한 ‘순천 문화예술인 아카이브’ 작업의 일환이다.
『예술인순천(藝術人順天 ‧ 예술in순천)』은 2022년 순천시문화도시센터로부터 용역을 받아 수행한 ‘순천 문화예술인 아카이브’ 작업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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