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 여순사건 74주기를 맞아 ‘현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얻고자 순천지역 학계는 분주하다. 오는 20일부터 3일간 제3회 순천대 인문학술원(원장 강성호)과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원장 전영준)의 공동학술대회 ‘여순 10.19와 제주 4.3의 새로운 이해’가 열린다. 순천대 인문학술원 예대열 연구교수는 여순사건 이후부터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전남 동부 지역민들의 ‘기억투쟁’ 고찰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 했다. 예 교수는 여순 사건을 ‘한편에서는 망각하며 살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끓는 점을 향해 비등해 왔다’고 평가한다.

1948년 이승만 정권은 ‘인민’을 ‘국민’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는 선거 등의 절차가 아닌 전면화된 국가폭력이 기반이었다. 북한을 외부의 적으로 만들고, 제주와 여순의 봉기한 지역주민을 내부의 적으로 상정하였다. 내부의 적이 사라진 후에야 대한민국은 온전한 ‘반공국가’, 대중은 ‘반공국민’이 될 수 있었다.

진상규명 과정은 두 지역에서 달랐다. 제주 4.3은 장기간 주민공동체의 집단 경험인데 비해, 여순 10.19는 단기간 전남 동부지역의 단절된 경험이었다. 제주도민은 지역공동체 전체의 해결 과제로 인식한 반면, 여순 지역민은 가슴 속에 묻어버리거나 지워버리고 싶은 상처였고 콤플렉스였다.

두 지역의 진상규명 과정은 국민이 되는 ‘진입로의 유무’로 갈렸다. 제주도 청년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해병대 자원입대를 통해 ‘빨갱이’ 폭도가 아닌 순수한 ‘국민’임을 증명하였다.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 수복 등 여러 전투의 주역이 되었다. 전남 동부지역민은 전쟁 직후 인민군 치하 2개월 후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반공국민’임을 증명하고자 했지만, 끊임없이 자질을 의심받는 존재로 남았다.

여순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의지가 처음 드러난 사건은 1963년 대선이었다. 윤보선은 박정희를 여순사건과 관련 ‘빨갱이’라고 공격했지만 1.5% 차이로 패배했다. 김대중은 ‘미군정 3년 동안 무고하게 빨갱이로 몰린 전라도 사람들이 반발해서 박정희를 밀었다’고 밝혔다. 민정당의 윤보선은 호남 기반 야당 후보였으나, 전남 동부지역 득표율은 박정희의 50% 정도에 불과했다. ‘빨갱이’ 박정희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상처를 보듬지 않은 윤보선에 대한 심판이었다.

1962년 ‘여수향토사’ 발간을 통해 김낙원은 토벌군의 민간인 학살을 처음으로 문제 제기했다. 봉기군이 지리산으로 이미 빠져나갔음에도 여수 시내를 불태우고, 종산국민학교 민간인을 즉결 처분하는 등 학살과 공동체 파괴 행위를 비판했다. 주영철 주간의 ‘여수 여천 향토지’(1982), 김계유의 ‘여수 여천 발전사’(1988) 등은 공식 역사 서술과 다른 의미 있는 ‘대항 기억’을 만들어왔다.

제주 4.3 사건은 진상규명, 명예회복, 국가의 사과를 이루고, 배상을 논의하는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까지 ‘정명’의 과제는 남겨놓았다. 여순 사건은 진상규명과 조사 활동의 결과가 충분하지 않음에도 ‘항쟁’으로 미리 ‘정명’하고 있다.

예 교수는 “역사는 짐이자 힘이다. ‘망각’을 강요당했던 세월이 있었지만, 그 안에서 끓는 점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을 ‘비등점’까지 끌어 올리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고 강조한다.

한편 오는 20일 공동학술대회 1일째에는 순천대 국제문화컨벤션 소극장에서 예 교수의 발표 외에 ‘국가폭력과 트라우마’, ‘여순사건 관련 해외 자료 수집 현황과 과제’ 등 주제발표와 토론이 있다. 2일째에는 여수 14연대 주둔지, 순천 매산등 답사가 진행되며, 3일째에는 순천대 인문학술원에서 간담회가 열린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