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962년 순천 수해

제목으로 사용한 위의 글은 1962년 9월 5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당시 순천남국민학교(순천남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석찬 님 글에서 가져온 것으로, 같은 해 8월 28일 발생한 순천 수해의 참혹함을 표현한 위 글의 일부이다.

현대인으로 콘크리트 속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기도 바쁜 지금, ‘순천 수해’는 수 백 년 전의 이야기로 기억되거나 잊혀진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순천 수해는 성동초등학교에 모래와 자갈이 1m 가량 쌓였을 정도로 도심 대부분이 물에 잠긴 재난 사고다. 당시 사망 254명, 실종 41명 등 총 409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재해로 순천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도시의 기억 가운데 하나이다. 

순천 도심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동천은 조선시대 순천읍성의 동쪽에 흐르던 하천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지만, 동천과 그 주변은 예나 지금이나 목적은 다를 지라도 시가지 확산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소위 그린벨트 같은 곳이다. 특히 수해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곳은 백여 년 전까지 순천읍성의 도시공원과 공회당으로 활용되던 환선정지 일원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조성을 위해 매립하고 ‘궁민구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쌓은 제방과 하천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이재민 1만 2천여 명 가운데 동외동과 매곡동 이재민 4천 4백여 명은 북초등학교에, 저전동 이재민 3백 6십여 명은 남초등학교에, 335세대 1,974명이 철도운동장에 가설된 천막촌 등 10개의 수용소에 분산 수용된다. 

순천지역 수해 복구사업은 우리 시민의 의지와 함께 군을 포함하여 전국민의 거국적인 도움이 있었다. 광양에서 300명, 공병대 1개 중대, 불도저 6대, 크레인 2대가 긴급 투입되었다. 아울러 전염병 예방을 위해 의료기관이 총동원되어 방역에 나섰다. 미 8군은 헬기 2대로 담요와 의료품, 식량 등을 지원하고 별도의 헬기1대를 구조 활동에 투입한다. 수해복구 지원을 위해 국립극장에서 순천 수해 구호금 모금 음악회가 열리고, 교황 요한23세와 소록도에서 의연금을 보냈고 각 언론사를 통해 구호품이 답지했다. 또한 군에서는 643명과 57대의 장비를 투입하여 도로 치수와 택지 조성 등이 진행된다. 이와 같은 장비 지원 규모가 현재와 비교하면 부족해보이지만 당시 순천에서 운행하는 택시가 총 10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천의 수해 복구사업은 단순 복구사업이 아니라 유사 재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도시공간으로 개조하는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지금의 연향, 금당, 신대 등의 신도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 신도시 건설로 계획된다.

당시 언론은 주택과 도로 등을 보다 계획적으로 현대 도시계획에 의해 복구할 것이라고(조선일보 1962.9.2.) 보도하고 있다. 수해복구 주택의 순조로운 입주를 위해 6개 주택건설업자로부터 11월 말까지 공사를 끝내겠다는 각서를 받아 추진하고, 동천과 옥천의 개량, 도로 교량 19개소 등이 12월 20일까지 1차 완료할 일정으로 추진된다(경향신문 1962. 10,30). 특히 수해의 발단이 된 동천 제방 1만2천80미터를 제207 공병대는 정성을 다해 구축한다.

순천 수해는 자연과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여 조성된 조선시대 저류지인 환정지를 절제되지 못한 욕심으로 매립하여 낳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 이러한 자연에 역행한 잘못을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동초등학교와 오천동 일원에 재해 예방 대책으로 저류지를 만든 것은 나름 의미 있는 도시 관리 방책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 도시는 백여 년 전과 비교하면 급격한 인구 증가와 세대 분화에 따른 시가화로 하천유역을 확장할 수 있는 여력은 없다. 하지만 얼마전 서울 도심의 수해 피해에 견주어 볼 때, 우리 도시의 재난사가 과거의 일회적 사건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천과 수자원 관리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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