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도 어느덧 이순(耳順)에 가까워지고 있다. 공자께서는 이순은 귀가 순해져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 하셨다. 60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에 이르고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요즘 가끔 사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타인들의 시선폭력과 차별의 언사(言辭)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롭다. 그런데 언제부터 장애인이라고 비하(卑下)하는 말과 놀림에서 초연해진 것일까? 아니 사실은 지금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허리를 다쳐 장애를 안고 살아왔는데, 몸이 힘든 것보다 주변의 편견과 멸시의 시선이 훨씬 더 마음의 상처를 덧나게 했다. 그때마다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어려서 친구들이 외모가 남다르다며 손가락질하고 놀려댈 때, 내 잘못으로 얻은 장애가 아님에도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슬픈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대접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너는 당연히 못할 거야’ 지레짐작으로 나를 배제시켜버렸다. 또는 비장애인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평가 절하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럴 때 내 심정은 어떠했을까?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구 선진사회와 달리 어려서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상대방이 불편한 일이나 불합리한 점을 깨닫고 보충해주는 생활에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처음부터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격리하고 소외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다 보니 비장애아는 자신과 다른 모습의 장애아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걸 당연시하게 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장애아를 흉내 내며 놀리기까지 한다. 그러다 보니 이사회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기지 않고 돌봐야 하는 계층으로 분리하거나 자기 주변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면 결사 반대를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장애우 복지정책은 과연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에 걸맞는 수준인지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흔히 "과거와 비교하면 좋은 세상이여! 전에 비해 세상이 엄청나게 좋아졌지."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나는 3년 반 전에 허리 수술을 하면서 1년 6개월간 병원 생활을 했었다. 50년 전, 처음 허리 수술을 받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료기술과 의료서비스가 발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환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하는 순간 누구나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가끔 장애인 이동지원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처음에는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고, 운영하는 분들의 서비스도 별로였다. 이용하고 싶지 않을 만큼 불편하고 서비스의 질이 낮다고 생각했다. 몇 번 시청에 항의하고 자구책을 강구한 덕에 지금은 서비스가 많이 좋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바우처 택시가 생겨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건 아쉬운 점이다.

활동지원 서비스도 받고 있다. 출퇴근할 때, 근무처에서 업무를 보거나 사회활동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활동보조사의 자격이 조금 더 장애인의 특성에 맞게 교육의 전문성이 이루어 졌으면 한다.

장애인복지는 여러 부문에서 넓고 두텁게 보편적복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의 염통에 쉬스는 것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다.’고, 자신의 아픔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고통스러운 법이다. 그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남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슬퍼하는 성정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므로, 타인-장애인이 느끼는 불편함을 이해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이 자신의 잠재능력과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데 동참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다양한 자질을 주저 없이 드러낼 수 있도록 협조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수준에 맞는 장애인 교육과 복지가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장애인들도 누구의 짐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배양(培養)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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