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다고, 그러코 허믄 쓴다냐?”

낮에 있었던 얽히고설킨 일을 때때로 저녁 밥상에서 퇴근한 아내와 나누곤 했는데, 아들의 뒷말에 어머니는 어느덧 들으시고는 늘 그렇게 타박하곤 하셨다. 아들이 미덥지 못하여 앞세우는 염려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런 마음을 내려놓으시라며 앞은 이렇고 뒤는 저러한 경황을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러니, 어머니는 늘 안타까움을 품고 지내셨을 테다.

1989년 ‘전교조’ 활동과 관련해 해직된 시절,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치매의 정도가 깊진 않으셨다. 그래도 깜빡깜빡 정신을 놓은 적이 없지 않기에 농민회와 함께 쓰는 사무실로 출근해서도 불안하곤 했다. 짬을 내서 스쿠터를 타고 집에 들러 요모조모 어머니의 상태를 살피면,

“암시랑토 안 헌디, 멜겁시 그라네.”

도리어 바쁜데 뭐 하러 왔냐는 눈길을 건네셨다. 아들이 학교 밖으로 내쫓겼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셨기에 굳이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도 집에 들를 시간이 아닌 데 아들이 집에 와 기웃기웃하는 게 영 마땅하다 여기지 않으신 듯 당신의 안위보다 아들 걱정이 우선이었을 터이다.

살던 옛 동네에서 꽤 망나니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고 더러 소갈머리 없이 술독에 빠져 진창만 밟고 다니던 아들의 청춘 무렵을 지켜보셨던 어머니는 그런 자식이 ‘아그덜 겔치는’ 선생이 된 걸 아주 기뻐하셨는데, 10년 동안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다.

치매가 중증에 이르러 여러 정황 끝에 어머니를 누님 댁으로 모시게 되었을 때다.

“근다고, 그러코 허믄 쓴다냐? 암시랑토 안 헌디, 멜겁시 그라네.”

라, 하시는 게 아닌가.

당신의 유일한 남동생인, 인공 때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외삼촌으로 아신 듯 아들을 ‘동상, 동상’이라 부를 만큼 치매가 심해졌는데도, 혼미한 정신으로도 딸 집보다 아들 집이 그나마 덜 불편하다 느끼셨을까? 누님 댁으로 가시게 되면서 정신이 후다닥 돌아오셨는지 아들을 그리 나무랐다. 치매의 정도가 갈수록 더 깊어져, 당시엔 후레자식 소릴 들을 때였지만 누님댁에 더 모실 수 없어 요양원으로 어머니의 처소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또 얼마 동안 지내셨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딱 21년이다.

아이 셋이 커서 이제 다들 제 삶을 일굴 나이가 되었다. 다섯 식구가 한자리에 둘러앉은 어느 해 명절날이다. 아이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둘째가 직장 동료 누군가가 좀 언짢게 하길래 톡 쏘아붙였다는 말끝에 정신 짱짱하실 때 당신이 업어 키운 첫째가 불쑥,

“근다고, 그러코 허믄 쓴다냐?”

며, 피식 미소를 머금는다. 서울 사는 30대 중반인 큰애가 전라도 순천의 부모 집에 와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할매넌, 그 말 끄터리에 ‘암시랑토 안 헌디, 멜겁시 그라네.’ 허셨제.”

라며 내가 잇자, 다들 한바탕 웃는다.

치매를 심하게 앓는 중에도 퍼뜩 되살아난 정신으로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명절이 되면 더 그립고, 서럽다. 어머니의 속내가 담긴 그 입말을 자식에게서 듣고, 건네며 나 또한 그동안 어머니의 그 애잔한 표현을 적잖이 토로하며 살아왔구나, …회억한다.

엄니, 엄니, 우리 엄니!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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