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지난 629일 본회의를 열어 재적의원 231명 가운데 찬성 225, 반대 1, 기권 5명으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73년 동안 반란이라는 굴레 속에서 하소연조차 빨갱이로 몰릴까 봐 침묵해야 했던 금기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그 누구보다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유족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

 

본지는 여순사건 특별법국회 통과를 환영하며 특별법 취지와 의미를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특별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규종(75) 여순항쟁유족연합회 회장 특별 인터뷰와 그동안 유족과 함께 여야 국회의원들을 찾아 호소하며 특별법 통과에 이바지한 박소정 여순1019특별법제정범국민연대 대표 특별기고에 이어 특별법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여순항쟁 역사연구자이자 역사공간 벗 대표연구원인 주철희 박사 특별 인터뷰를 싣는다.

 

“국가 차원 진상규명·희생자 명예회복 길 열려”

‘반란’이라는 굴레 벗고, 시·공간적 범위 확장해

“‘여순사건’‘10·19사건’ 아닌 ‘항쟁’ 성격 담아야”

 

지난 2일 여순항쟁 연구자이자 역사공간 벗 대표연구원 주철희 박사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순천광장신문
지난 2일 여순항쟁 연구자이자 역사공간 벗 대표연구원 주철희 박사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순천광장신문

본지는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특별기획 시리즈를 연재키로 편집방향을 정했다. 특별법 본회의 통과 기사를 시작으로 유족 입장에서 본 특별법 통과, 특별법 준비 과정부터 본회의 통과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 역사학자가 본 특별법 통과 의미와 과제, 법학자가 본 특별법의 의미와 문제 등을 특별 인터뷰와 기고로 담기로 했다.

여기서는 특별법 통과를 위해 20년 넘게 ‘여순항쟁’을 연구해온 역사공간 벗 주철희 박사를 최근 만나 특별법 통과 의미와 이후 과제를 인터뷰했다.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와 여수 바닷가가 훤히 보이는 역사공간 벗 연구실에서 주 박사와 나눈 이야기를 두 차례에 나눠 연재한다.

주 박사는 특별법 제정으로 “국가 차원에서 진상규명·희생자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가장 큰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특별법 제2조(정의)를 통해 ‘반란’이라는 굴레를 벗고, 시간적·공간적 범위를 확장시킨 데도 무게를 뒀다.

나아가 결국 최종 ‘진상조사보고서’에 담길 내용으로 지역에서부터 한목소리로 ‘여순사건’이나 ‘10·19사건’이 아닌 ‘여순항쟁’ 나아가 전남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로 ‘전남10월항쟁’으로 부르자고 주장했다. 주 박사는 “그동안 연구 결과 ‘항쟁’ 성격이 분명하다”고 못박으면서 순천지역이 팔마체육관에 있는 ‘여순사건위령탑’을 지난해 ‘여순항쟁탑’으로 바꿔놓고도 그 뒤에 안내판에는 다시 ‘여순10·19’라고 표현한 데 대해 아쉬워했다.

역사공간 벗에서 내려다 본 국군 제14연대와 여수 바닷가. ⓒ순천광장신문
역사공간 벗에서 내려다 본 국군 제14연대와 여수 바닷가. ⓒ순천광장신문

다음은 주철희 박사와 나눈 이야기 가운데 특별법 통과 의미를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Q. 여순사건 특별법이 20년 만에 국회를 통과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해 달라.

A. 국가 차원에서 진상규명, 희생자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벌써 73년이 지났고, 특별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한 지 21년 만에 제정됐다. 특별법을 제정하려면 ‘여순항쟁’이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지난 20대 국회까지는 여순항쟁을 정의할 때 반란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 발발이라고 표현하는 데 그쳤다.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규정되지 않았다. 또한 ‘여순’이라고 하면 여수·순천 지역 피해자만 규정하는 건가 하는 문제가 있다. 시간 범위는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5년 4월 1일까지로 규정했고, 공간적 범위는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를 포함했다.

이번 특별법에 시간적, 공간적 범위가 규정된 건 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정해진 것이다. 특별법 통과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소회가 남다르다.

Q. 1955년 4월 1일 지리산 입산금지가 해제됐는데, 사실상 한국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를 가질 것 같다. 그 기간까지 확장시킨 이유가 뭔가?

A. 제주4·3 특별법을 준용하자는 것이다. 제주4·3 특별법을 만들 때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서 1954년 9월 21일까지로 기간을 정했다. 여기서 1954년 9월 21일은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날이다. 아직 한라산 일부에 인민유격대가 있지만 거의 다 진압했다는 의미다.

여순 특별법과 제주4·3 특볍법이 동일 선상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한다면, 제주4·3 특별법을 준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토벌을 마무리 지은 날짜를 찾다보니까 1955년 4월 1일 지리산 통행금지를 해제하며 서남지구사령부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 시기까지 확장했다.

지난 2일 여순항쟁 연구자이자 역사공간 벗 대표연구원 주철희 박사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순천광장신문
지난 2일 여순항쟁 연구자이자 역사공간 벗 대표연구원 주철희 박사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순천광장신문

Q. 특별법이 의미있다고 생각한 게, 그동안은 여순항쟁을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출발점이 제주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는 의미가 들어갔다. 여순‘반란’에서 벗어났다고 보는 게 맞는가?

A. 법 조문에는 그렇게 쓰지 못했지만, 국군, 지금까지는 국방경비대라고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쓴다. 일부 언론과 16, 17대 국회에서 법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사실관계 확인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은 1948년 9월 5일 국방경비대는 육군, 해양경비대는 해군으로 발족을 했다. 그리고 정부조직법에도 국방부를 만들었다. 국방부 초대장관으로 이범석을 앉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국방경비대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군 제14연대라는 말을 썼다.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가 내린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 여기서 4·3사건 진압 명령이 부당하다는 말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부당하다는 것이 내포돼 있다. 법 정의에 집어넣지는 못했지만, 이건 진일보한 문제다.

그동안 군인이 명령을 어길 경우 무조건 반란으로 규정을 했는데, 이건 반란이 아니다. 그 진압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 아주 큰 의미가 있다.

Q. 특별법을 제주4·3 특별법과 연관지어 준비한 걸로 알고 있고, 또 앞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여순항쟁과 제주4·3사건 연결고리가 생겼다. 여순 특별법을 제주4·3사건과 같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놓고 보게 된 것도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A. 역사는 당시 일이 중요해서 역사라고 하지 않는다. 그 역사가 가지는 영향과 여파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역사라고 규정한다.

여순항쟁 영향은 이후부터 2021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체제를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여순 체제 때 논의됐던 이분법적 ‘빨갱이’라는 사고가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인식시키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걸 이야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피해자 이야기만 하려고 했다.

이번에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며 많이 바뀌었다고 본다. 우리부터 여순항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꿨다. 그 당시 여순에서 일어난 것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느냐 하는 건 더욱 중요하다.

역사공간 벗 연구실 내부. ⓒ순천광장신문
역사공간 벗 연구실 내부. ⓒ순천광장신문

Q. 기록 이야기를 하셨는데, 지금까지 ‘여순항쟁’이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런데 특별법 제정 과정에 항쟁이 아닌 ‘10·19사건’이라고 하고 있다. 어떻게 봐야 하는가?

A. 순천(지역)에 아쉬운 점이 있다. 여순사건위령탑을 왜 갑자기 ‘여순항쟁탑’으로 바꾸더니 이제는 안내판에 ‘여순 10·19’라고 쓰냐는 것이다. 순천에서 말하는 여순10·19는 정식적인 용어가 아니다. 여순항쟁이 정식적인 용어가 아니면 여순10·19도 정식적인 용어가 아니다. 정식적인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며칠 전에 전라남도교육청에서 강의했는데, 그때가 마침 특별법이 법사위를 통과한 날(6월 25일)이었다. 강의를 듣던 사람들이 특별법에 대해 질문을 했다. 진상보고서는 사실관계로 쓰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거기엔 지역사회 여론이 반영된다, 지금부터 전남도교육청부터 ‘여순항쟁’이라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부터 교과서에 쓰인 용어가 공식적이라며 ‘여순사건’이라고 부르고 ‘여순10·19’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진상보고서에 이걸(여순항쟁) 못 쓴다. 우리부터 쓰면 진상보고서에도 ‘여순항쟁’이라고 기재할 수 있다. 지금부터 국가와의 싸움도 있지만, 우리들과의 싸움도 있다. 우리의 마음이 진상보고서에 담길 수밖에 없다.

제주는 4·3을 일으킨 사람을 무장대라고 한다. 그런데 1948년에는 무장대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주인민유격대’였다. 이걸 제주 전문위원들이 요구했는데 국가는 반란군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무장대’로 합의됐다. 싸우다 안되면 너네 지역에서 합의 못한 걸 왜 여기서 합의하려고 하냐는 주장을 하게 돼 있다.

우리가 주장하고 우리가 부른 것들이 진상보고서에 담길 수밖에 없다. 보고서를 쓰게 되면 누가 와도 사료로 이길 자신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지역 여론을 근거로 싸운다. 우리 지역에 이 특별법 통과로 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처럼 인식이 전환돼야 한다. 인식이 변화하면 진상보고서를 잘 쓸 수 있는데, 진상보고서가 엉망이면 들어간 사람도 문제가 있지만, 지역사회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거나 인식 전환을 못한 것이다.

지난 2일 여순항쟁 연구자이자 역사공간 벗 대표연구원 주철희 박사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순천광장신문
지난 2일 여순항쟁 연구자이자 역사공간 벗 대표연구원 주철희 박사가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순천광장신문

Q. ‘여순사건’이냐 ‘10·19사건’이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명칭, 법적 용어, 지역 분위기 자체가 합의되기에 쉽지 않다.

A. 정명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정명은 역사에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가 어떤 성격을 담고 있냐는 것이다. 국가는 앞으로 내년 대선에서 어떤 진보적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대통령이 되는 순간 국가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이전에 가졌던 본인의 사고력을 다할 수 없다.

국가가 가장 첫 번째로 연구하는 건 국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5·18민주화운동도 그렇다. 운동은 어떤 가치를 실현시켜가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처럼. 민주화라는 가치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것이 운동이 갖는 개념이다. 국가가 뭘 잘못해서 광주시민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우리가 60년대, 70년대부터 쭉 이어오던 민주화 속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운동을 붙인 것이다. 국가는 어정쩡하면 운동이라는 말을 붙이기 좋아한다. 국가의 부당함이나 잘못됨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벌였다. 1919년에는 ‘기미독립만세’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폭동이다. 이들은 신문에 소요사태라고 썼다. 최대한 축소하기 위해 ‘3·1’이라고 썼다. 이후 우리는 이걸 차용해 날짜를 쓰기 시작했다. 역사의 유래를 보자. 가장 중요한 역사를 동학이라고 본다. 대한민국 역사는 ‘4·19’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그런데 4·19 행사는 적다. 4·19 세력이 정치에 개입하면서 4·19가 훼손된 것이다. 또한 구심지역이 없다. ‘5·18’도 세계화한다는 취지는 좋으나 ‘광주’가 빠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구심점이 사라진다. 역사가 갖고 있었던 정체성을 그 지역에 명확하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역사의 명칭에는 반드시 성격이 들어가 있다. 나같이 연구를 해보니 ‘항쟁’이니 항쟁이라고 쓰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명칭이 어떻게 부여됐는지 따져보니 이게 맞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건’이라고 쓰지는 말자. 거기에 담긴 함의가 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명칭 인식을 한 번 심어놓으면 그렇게 쓰게 된다.

명칭은 역사에서 중요하다. 앞으로 50년 뒤면 여순과 제주를 같이 기록할 것이다. 제주도, 여수도 항쟁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명확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여순’이라는 명칭을 쓰니 여수나 순천만 도드라진다는 데 공감한다. 조사범위도 전남 전체다. 그렇기에 전남을 표기해 ‘전남10월항쟁’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전남을 다 아우르는 표현으로 ‘전남10월항쟁’이라고 조심스럽게 고민해가며 담아내 보려고 한다. 여수·순천을 뛰어넘어 전남 전체라는 긍지도 줄 수 있을 것 같다. 성격은 ‘항쟁’이다. 합의가 이루어지면 좋겠다.

특히 진압 명령이 부당하다고 내포하는 내용이 담긴 건 한 사람 연구로 이루어진 것이다. 확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선도적으로 연구결과를 이야기한 결과물이다. 인식의 전환됐다. 우리가 선도적으로 하면 된다. 누가 선도적으로 시작하면 일반 대중들의 사고력이 역사에 편입된다. 지금이 중요하다. 역사는 현재 내가 어떻게 보고 기록하느냐는 게 중요하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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