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참 예쁘구나.”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봐 준 선생님, 그 외에 다른 기억은 없지만 그 분 얼굴이 선명하다. 어디에서 만나도 반가울 것 같다. 별로 공부도 못하고, 탁월한 능력도 없는 평범한 아이가 교사의 칭찬을 듣는 일은 상을 받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16년의 긴 학교생활 중에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누구냐?” 물으면 대체로 ‘자기를 챙겨 준 선생님’이라고 답변했다. 챙겨준 것은 별것이 아니다. 한마디 따뜻한 말, 어려운 형편에 대한 배려…. 그 정도다. 스승의 날은 그런 선생님께 작은 고마움이라도 전하고 싶은 날이다. 한참 세월이 지나 그 마음을 전하는 일은 아름답고 귀한 것이나 실행하기 쉽지 않고, 당장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고민하게 되는 스승의 날이다. 


선물이야? 촌지야?

스승의 날을 맞아 그냥 넘어가기도 께름칙하고, 선물을 하자니 어느 선에서 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 안서서 고민스럽다. 스승의 날, 선물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교사, 학부모가 한자리에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부모 1: 스승의 날 만큼은 마음 편한 선물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학부모 2: 주는 사람 한 번 더 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주지 못하는 부모를 생각한다면 안 해야 한다. 주더라도 이해관계가 끝난 후에 주는 것이 맞다. 결국 잘 봐달라는 대가성 아닌가?

학부모 1: 부담 없는 ‘작은 선물’은 오고가는 정이다. 스승의 날이 되면 오히려 불편하고 힘든 것이 교사들일 것 같다.

교사 1: 스승의 날이 되면 죄인이 된 기분이다. 그때마다 언론은 촌지문제를 기사화하여 교사들 사기를 꺾는다. 고등학교에서는 실질적으로 선물하시는 분 별로 없다.

교사 2: 나도 교사지만, 내 경우 아이가 어렸을 때 스승의 날이 더 고민되었다.

학부모 1: 선물 원하고, 받으려는 교사는 소수 몇 명에 불과하지만 일어탁수다.

교사 2: 선물도 촌지다. 학년말에 주는 좋은 책 정도의 작은 선물은 고마운 일이다. 남도 하니까 나도 하는 것은 분명 촌지다.

학부모 2: 시골에서 순천으로 이사를 나왔는데 애들이 반에서 임원을 했다. 엄마가 학교 들락거리면 의지력이 약해질 것 같아 학교에 가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그렇게 해도 별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순천으로 이사 오고는 우리 아이만 차별을 했다고 한다. 손을 들어도 시켜주지 않고, 우리 딸을 묵사발로 만드니까 당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입술이 짓무르고 부르텄다. 당시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 교사를 길가에서 마주쳤는데 그 상처를 못 잊고 지난 이야기를 꺼내더라.

학부모 1: 어떤 교사는 촌지 받는 것으로 유명해서 학부모들에게 소문이 쫙 났다. 안 듣는 곳에서는 창피스럽다고 뒷말을 한다. 저런 사람은 교회도 안 다녔으면 좋겠다고 수근거린다.

교사 1: 담임을 꽤 오래했다. 나는 스승의 날 1주일 전쯤에 꼭 학생들에게 요구한다. “돈은 걷지 말고, 선물하지 말라. 대신 스승의 날이니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라. 선생님 잔칫날이니 술이 빠지면 안 된다. 막걸리 한 병에 1500원이다. 반장이 사라. 부반장은 안주로 두부김치를 준비해라. 제발 스승의 날 노래는 부르지 마라. 소름끼친다. 내가 담임 하면서 해마다 지키는 전통이니 꼭 지켜주면 좋겠다. 쪽지를 쓰는 것은 마음의 선물이니 얼마든지 환영이다.” 강요하다시피 당부한다.

교사 2: 어느 교직단체에서는 ‘스승의 날’을 5월 10일(1986년 5월 10일에 있었던 <교육민주화선언> 발표)로 옮겨 자축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학년말인 2월로 옮기자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두 눈이 총총해서 스승의 날 선물을 만드는 아이들

별량중학교에 다니는 세영이와 지아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중학교 2학년이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지만 공부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한다. 졸리다며 금방 딴 짓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느 날엔 저녁도 안 먹고 방에 앉아서 큰 전지에 사진을 붙이고 자르고 작업에 한창이다.

스승의 날을 맞아 친구들이 쓴 편지와 그간 찍은 사진을 모아 꾸미는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 공부하라면 한 시간도 못 채우던 아이들은 선물 준비에 밤 12시가 넘도록 화장실도 안 가고 드디어 작품을 만들었다. 연신 행복해하는 아이를 쳐다보는 엄마는 속이 터지지만 한편으론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정성을 다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기도 덩달아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스승의 날이 답답하고 괴로운 이유 - 교사의 고백

스승의 날은 수고하고 힘든 교사를 기리는 날이다. 그것은 천금같은 학생들을 올바로 잘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가능한 날이다. 현 교육체계에서 학생들의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성장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럴 때 스승의 날은 떳떳하고 아름다운 날이다.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질이 낮고 왜곡된 데다가 정서적, 신체적 발달을 저해하는 현재의 교육체계에서 스승의 날이 명분이 있는가?

한국교육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교육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중 하급에 가깝다. 교육이란 수많은 논리와 이론을 떠나 ‘아이들을 신체, 정서적으로 발달시키고 영혼이 건강하고 조화롭게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교사들도 있다. 그러나 주류 한국교육은 병이 들대로 들어 어떻게 처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스승의 날이 답답하고 괴로운 이유다.

교사의 역할을 떳떳하게 행하지도 못하고 있지만 어떤 요인이건 스승의 날은 나의 이상과 양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항상 괴롭고 답답했다. 교실에 들어가면 노래를 부르고 선물을 준다. 철없는 교사시절 그것이 즐겁고 좋기도 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스승의 날은 “교사란 무엇인가?” 자문하는 날이 되었다. ‘스승’이라는 말은 학생의 성장에 결정적 영향을 준 인품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이 받는 호칭이다. 굳이 그날이 필요하다면 ‘교사의 날’이라고 해야 한다.


촌지에 얽힌 가슴 아픈 추억

사춘기를 맞은 가영(가명)이는 수업 중에 딴짓을 해서 교사에게 지적받는 일이 많아졌다. 지적의 정도가 점점 심해져 급기야 선생님이 가영이의 머리를 툭툭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엄마 입장에서는, 가영이가 원체 순한 아이라 그런 취급까지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속이 상해 당장 학교에 찾아가겠다고 하자 가영이가 말린다. 자신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엄마의 속상함을 눈치 챈 아이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행동이 좀 개선되어 별 일 없나보다 생각하는 어느 날, 가영이가 울면서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이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며 전학을 보내달라고 했다.

부부는 그날 밤 늦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교사에 대한 분노로 학교에 찾아갈 것인가, 전학을 위해 이사를 갈 것인가, 고민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국 책 한권과 상품권이 든 봉투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학교를 찾아가 책을 내밀었다. 선물을 드리고 난 후 아이의 학교생활은 달라졌다. 선생님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챙긴다는 것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가영이 엄마는 촌지로 상황을 개선시키려 했던 자신의 처신을 부끄러워하며 분개하고 있다. 참 곱게도 차려입고 선한 미소를 지닌 그 여선생을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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