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이·사·는·법-순천 농부 한원식 선생님 인터뷰

이른바 도를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자연에서 살아라, 하늘의 섭리를 따라라 하는 소리들을 할 때마다 저는 짜증이 났습니다. 초등학생도 써야 하는 스마트폰 요금만 오륙만원 나오는 이 시대에 자연에서 밭을 일구면서 뭘 어떻게 살란 말인가? 멈추면 뭐가 보인다고 어떤 빌어먹는 사람이 썼다는 책은 아마 그렇게 허공을 떠다니는 헛소리의 결정판일 것입니다.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 소리를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순천 어느 산골에서 전기도 없이 농사짓고 산다는 한원식 선생님이 통영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래서 저는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인도에서 저에게 요가철학을 가르쳐주면서, 자기는 아직도 유치원생 수준이라고 늘 강조했던 달마난다 선생님이 말하기를, 지가 깨달았다고 하는 놈이 있거든 왼쪽 뺨을 한번 때려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놈이 웃는 낯으로 오른쪽 뺨마저 내민다면, 그때 납작 엎드려 경의를 표하라고 했습니다. 2013년 12월 19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견내량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한길차방에 한원식 선생님이 찾아왔을 때, 그래서 저는 이런 음흉한 마음을 품고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이날 선생님의 아들인 한영 씨가 함께 있어서 “대질 심문”(^)을 하기에도 딱 좋았습니다.

제가 솔직히 까놓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오늘 선생님 인터뷰를 해서 순천광장신문에 기사를 쓰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인터뷰 기사를 재미나게 쓰기 위해서 선생님 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가져왔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돈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산 속에 들어가 농사지으면서 건강하게 사는 걸 꿈만 꿉니다. 그런데, 꿈으로만 그치고 실천을 못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은데요. 첫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고, 둘째는 자식들 교육비 걱정입니다. 둘 다 돈에 대한 문제이지요. 선생님은 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하루 16시간씩 자연과 벗하며 들판에서 노동을 하는 한원식 선생님
한원식 선생님은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었나 봅니다. 특히 농사짓는 방법, 건강을 스스로 돌보는 방법,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우주만물의 운행 원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열정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드린 질문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답을 했기 때문에, 저는 스무 고개 넘듯이, 집요하게 질문들을 한 연후에야 전체 스토리를 엮을 수 있었습니다.

▲ 잘 정돈된 논과 밭
지금부터 쓰는 글은 그렇게 들은 내용을 제가 다시 엮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기사를 쓰고 나서 선생님께 내용 확인을 못 받았습니다. 이 기사는 선생님의 말씀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 저의 이 글이 선생님의 본래 뜻이라고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 쓴 글들은 장용창이라는 사람의 귀로 걸러 들은 한원식 선생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삶의 궤적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 소리는 헛소리들에 불과하다고 저는 정말로 믿습니다. 그래서 먼저, 한원식 선생님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대충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한원식 선생님은 2013년 현재 대략 60대 중반쯤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쯤 태어난 것 같군요. 선생님의 고향은 충남 공주입니다. 여기서 삼십대초반인 1980년대초까지 농사 짓고 살았습니다. 결혼도 했고요. 두 딸과 아들도 함께요.

그 당시에 선생님은 소유한 땅이 없어서 문중 땅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이거 알아내느라 질문을 여러 번 했습니다. 저만 그럴까요? 귀농하려고 고민할 때마다, 그럼 땅은 어디 있어서 농사짓지? 하는 고민부터 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기 땅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최고의 농부로 불립니다. 참 신기한 노릇입니다.

삼십대 초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생명농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의 생명을 죽이는 농약비료를 다시는 안 쓰리라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아들 한영 씨가 말하기를 아버지는 결단력이 대단한 분이라고 합니다. 뭐든 맘먹으면 실천해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런 결단력 덕분에, 유기농이 거의 시작되지도 않던 80년대 초에 유기농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추 농사 망해 먹고 자연농법 깨닫다

유기농을 하겠다고 맘먹고 처음에 공주에서 배추 농사를 했더랍니다. 마침 그해 장마가 져서 배추가 다 썩어버렸다고 하네요. 그런데, 땅을 갈지 않은 밭 구석에 심었던 배추만 잘 살아났답니다. 그래서 바로 그때 “유기농만으로는 부족하겠다, 생명의 원리에 충실한 농사를 지어야겠다”하는 깨달음이 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밭을 갈지 않는 무경운 농법의 시작입니다. 밭을 갈지 않고 퇴비마저 뿌리지 않아야 식물들이 스스로 자라나기 위해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각종 재해에 대한 저항력도 높아집니다.

배추 농사 두 해째는 그렇게 무경운 농법을 이용해서 배추를 잘 길러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뿔싸 다른 집 배추들도 풍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배추를 갈아엎은 배추파동이 일어났으니, 아무리 유기농으로 기른 배추도 잘 팔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두 해 동안 배추 농사를 망해 먹고는 무경운 유기농법을 터득했지만, 큰 빚을 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원식 선생님은 무엇이든 해보고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는 농법이나 건강법도 죄다 본인이 해보고 터득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공주에서 시작된 자연농법은 경북 칠곡과 충북 제천을 거쳐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1997년쯤 순천 승주로 옮겨옵니다.


돈에서 해방되는 방법? 돈 거래를 하지 않으면 된다

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저의 질문에 대해 선생님은 그냥 돈을 쓰지 않으면 된다고 간단히 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냥 들을 리 없지요. 그게 뭔 소린지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그런 결단력 있는 실천을 낳은 경험이 있더군요.

처음 배추 농사를 망해먹던 80년대초에 빚을 1200만원 정도 졌더랍니다. 80년대초에 1200만원이면 지금으로 치면 몇 억원 정도 되는 돈이지요. 이 빚은 간단히 해결했답니다. 바로 “떼먹는 방법”으로요. 실제로 떼먹은 게 아니라, 마음 속으로 “그런 빚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공주를 떠나게 된 것도 그 빚과 관련되어 있는데, 아주 친했던 친척들마저 빚을 받으러 다른 동네까지 찾아왔더랍니다. 그래서 다시는 “돈 거래” 자체를 안 하겠다고 마음 먹었답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삼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선생님은 농산물을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 짓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모시는 일”에만 곡식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이라는 게 마음만으로 갚아지는 게 아니지요. 그래서 또 집요하게 캐물었습니다. “어떻게 갚으셨습니까? 더욱이 돈 거래 자체를 안 하기로 해서 농산물을 판매조차 하니 않으면 어떻게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까?”

답은 이랬습니다.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세상에 내어 놓으니, 세상도 자기에게 필요한 걸 주더라는 겁니다. 선생님은 유기농업의 선두주자이기 때문에 유기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기농업 기술을 방문객 누구에게나 무료로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그렇게 하늘과 땅의 기운을 듬뿍 가지고 있는 농산물을 이용해서 우리 몸까지 건강해지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 건강비법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농사기술을 배우고 건강비법을 배운 사람들이 그냥 아무 말 없이 돈 보따리를 놓고 가더라는 겁니다. “내일 뭐 먹고 살지 걱정하지 마세요. 하느님이 저 들판의 이름 없는 꽃들도 저리 아름답게 피워 주시는데. 우리 사람들을 돌봐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내일 일은 내일 걱정 하시고, 하느님께는 그저 오늘 하루 먹을 밥을 줘서 감사하다고 기도해보세요” 예수님이 했던 이 이야기를 이보다 더 강력하게 증명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기르지?

돈 거래를 하지 않음으로써 돈에서 해방되었다는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저는 야심차게 준비한 두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기르죠? 학교가 공교육이라고는 해도 이것저것 준비물에 학습지에, 학원도 보내야 하고, 돈이 만만치 않게 드는데,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이에 대해 선생님은 먼저 기르는 게 아니라 자라나는 거라고 답을 했습니다. “농작물도 농부가 기르는 게 아니라, 하늘과 땅의 힘을 얻어 농작물이 스스로 자라납니다. 아이들도 부모가 기르는 게 아니라, 하늘과 땅의 힘을 얻어 아이들 스스로 자라납니다.” 키야, 이것 참, 도덕경 지은 노자가 따로 없습니다. 아들 한영 씨는 중학교만 졸업했기 때문에 대학 보내느라 돈을 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의 질문은 집요합니다. “선생님을 보니 마하트마 간디가 많이 생각 납니다. 간디도 언행일치가 장난 아니게 쎈 사람이었거든요. 건강도 병원에 절대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챙겼고요. 간디는 스스로 작은 학교를 만들어서 아들들도 직접 가르쳤다고 합니다. 건강, 의학, 교육에 대한 생각들도 아주 투철했는데, 선생님의 생각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간디의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불만이 좀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영국 유학까지 가서 공부를 실컷 해놓고 아들들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는 거지요. 아무리 자연 농법이 좋고, 돈 거래를 하지 않는 삶이 좋다지만, 자식들이 이에 동의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자식들의 삶의 기회를 빼앗는 게 되지 않을까요?”


도인의 아들

이에 대해서는 아들인 한영 씨가 답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 삼십대 중반인데, 그 동안 잘 살았고, 지금도 괜찮아요. 저는 중학교만 졸업했는데요, 그것도 안 가려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그냥 몇년 놀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해서 겨우 중학교를 갔고, 그래서 열아홉살에야 중학교를 졸업을 했어요. 학교에서 배운 건 그냥 한글을 떼는 정도였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배운 게 부족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한영 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열아홉살에 서울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서울에서 무슨 기술을 익혀 십년 넘게 돈도 잘 벌었다고 합니다. 돈 거래를 하지 않는 아버지의 삶과 서울에서 돈을 벌었던 아들의 삶도 모순이 아닌가요라는 저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을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삶을 살고 저는 저의 삶을 사는 거지요. 저는 서울에서 돈버는 일을 하면서도 스트레스가 거의 없었어요. 어릴 때 하도 잘 놀아서 서울에서 일하는 것도 노는 것처럼 했거든요. 돈을 버느냐 안 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연스런 흐름을 따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럼, 삼십대 중반의 아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몇년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회사를 좀 차려서 돈을 더 벌어볼까 했는데, 잘 안되었어요. 그래서 새로운 걸 어떻게 해볼까 하고 아버지하고 상의를 좀 해봤는데, 한 십년 잘 놀았으면 되지 않았느냐고 하시더라고요.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귀농을 하고 저도 아버지처럼 돈 거래를 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저는 아버지만큼 결단력이나 실천력이 강하지는 않아요. 그것도 뭐 저는 저고 아버지는 아버지니까요. 하지만, 대략 방향은 그렇게 잡아놓고 있어요. 지금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데, 조금 있다 트럭으로 바꾸고, 또 경운기로 바꾸고 언젠가 손수레로 바꾸듯이 천천히 가려고 해요.” 그렇게 아들 한영 씨는 전라남도 곡성으로 내려가 삶을 모색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한원식 선생님 말씀처럼 아이들은 그냥 두면 저절로 자라나는 모양입니다. 어쩜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날 수 있었을까요?


좋은 이야기는 매일 들어도 좋다

한원식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제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것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습니다. 마치 삼십년 동안 밥을 먹었지만, 오늘 또 밥을 먹는 게 좋은 것처럼, 좋은 이야기들은 알고 있는 것도 또 듣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돈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돈 거래를 끊으면 해결된다는 한원식 선생님의 이야기는 두고 두고 실천할 이야기였습니다.

▲ 3년 전 이곳에 드나드는 한 벗이 지붕 위에 태양광을 설치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덕에 호롱불을 켜지 않고 전등을 켠다고..
▲ 산세를 바라보며 똥을 눌 수 있도록 화장실은 환히 트여있고, 남자소변은 따로 받아서 소중한 거름으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이걸 실천하기 위해 꼭 그렇게 산에 가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닐 겝니다. 그저 정직하게 일한 만큼 벌고, 필요한 만큼 쓰면 될 겁니다. 그렇게 저 자신이 하늘의 뜻에 따라 살면, 농작물들이 저절로 자라나듯 아이들도 저절로 자라날 테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진실을 삶 자체로 살아내어 보여주시는 한원식 선생님께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감사의 마음이 솟아납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가 나가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함께 계신 가족 분들이 불편할까봐 걱정이랍니다. 특히 겨울에는 계곡 물이 줄기 때문에 방문객들도 불편하답니다. 이 기사 읽고 너무 많은 분들이 찾아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용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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