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식 조합원

< 4월 3일의 일기 >
40대 중반을 넘긴 애엄마가 생애처음으로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을 한다고 부산을 떤다. 검사받을 병원에서 지키라는 금식과 음식 조절 등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극성이다. 여러번 검사한 나는 그저 저녁에 금식을 하여 공복을 유지하고 가는 것에 반해 거의 만 하루를 금식을 한다.

10시경
“검사 잘 받고 있는가?” 
“응, 깨어나서 결과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고생혔네. 추어탕 사줄까?”
“응.’
“열두시 금당골 추어탕으로 와.”
“알았어’.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일반적인 검사였다.

11시30분 
“아직 병원이야. 대장내시경 검사를 해보니 직장쪽에서 출혈이 있는데 직장암 관련이어서 CT 촬영하고 검사 기다려.”
“응. 별일 없을거야. 용종제거만 하는되는데 뭘.”

잠시 후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 나 직장암이래. 추어탕 먹으러 못가. 혼자 점심 먹어.”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하던 일을 중지하고 바로 조례동에 있는 ㄷ내과로 냅다 달려갔다.
병원 도착하니 검사결과가 나왔다. 
“암이라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지고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속이 철렁 주저앉는다. 그런데 어쩌랴! 기왕 발병한 거라면 중심을 잡고 서야하는 것이 남편의 모습이 아니던가?
위로가 아닌 다독거림으로 마음의 안정을 시켜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내 얼굴에도 쓰여 있나보다. 이건 서로 외나무 다리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일 것이다.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썩소.


건강검진받은 병원에서 화순ㅈ병원으로 긴급예약을 넣어준다. fax로 진단서, 경과, CT촬영 자료 등등. 화순ㅈ병원 예약환자가 밀려 일주일 뒤인 4월 8일 오전 9시로 예약이 잡혔다.
애엄마는 집으로, 나는 야간근무를 위해 사무실로 출근한다.


70년대 등장하는 불치병의 대명사가 암이었다. 서로 잊지 못하는 사랑을 이어가다 마지막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마지막 암에 의한 시한부 인생의 삶을 다루었다. 의료과학의 발달로 인해 과거보다는 완치율이 높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불치병의 대명사가 바로 암이다.


주변에 갑자기 앓는 사람들이 보이고, 얼마되지 않은 시간에 우리와 영영 이별하는 질환으로,  받아들일 때 그저 안타깝고 애처로워 연민의 정을 보내는 것이 다였다. 조금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면 이별할 때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나에게는 그저 남에게 발생하는 것으로 제3자적인 입장이었다.


잠시 근무하는 동안 내 머릿속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하얗게 비었다가, 꽉채웠다가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고 그저 멍한 상태다. 평소 내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동료들도 알았을까? 웬지 사무실 분위기가 싸하다.


인터넷으로 직장암에 대한 자료를 들여다보고, 짧은 지식으로 진단서에 있는 내용을 확인해본다. ‘직장암 2~3기로 추정되며, 전이여부는 모름.’ 아마도 최초 진단서의 내용은 이거였을 것이다. 3기 중반을 넘어섰을 경우 닥쳐올 미래의 불투명에 비한다면 이것은 회복 가능성이 어느 정도 점쳐지는 것으로 조금은 마음의 안정을 가져본다.


김경식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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