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기] 김계수 조합원

순천시는 농촌지역이 도시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외서면에서 18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올 봄에 또 다시 생일을 맞는 내 느낌은 예년과는 사뭇 달랐다. 어릴 적 생일은 선물과는 거리가 먼, 어머니가 쌀밥과 미역국으로 아침상을 차리는 날이었다. 젊은 시절에 생일은 1년 365일 중의 하루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하루였다. 느지막이 철이 들면서 생명은 기적 같은 우연이어서 오히려 필연인 듯하고, 생일은 진실을 찾는 긴 여행을 허락받은 날로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행’은 당연하게도 건강한 몸으로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 생일 직전에 몸이 조금씩 불편해지면서 만나게 된 한의사로부터 내가 앞으로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생일날이면 늘 생각해보던 그 ‘여행’이 올해는 갑자기 낯선 것으로 다가왔다.


몸에 탈이 날 것 같은 조짐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양쪽 무릎이 번갈아가면서 아파서 10여 년 전부터 병원과 한의원을 다니면서 괜찮아지면 또 잊어먹고 일을 계속해 왔다. 그러다 지난해 봄부터 다시 왼 다리가 일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만큼만 아프기 시작했고 그것이 조금씩 심해져서 올 봄에는 평지에서의 걸음이 균형을 잃고, 하루 일을 온전히 하는 게 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한 ‘귀인’을 만나고, 그것이 근골격계에 흔한 만성질환이라는 결론을 받아들게 되었다. 만성질환이라면 오랫동안 주로 잘못된 생활습관이 지속되어 생긴 병이다. 그래서 지나온 삶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되었다.

▲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보행기에 의지해서 걷고 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나더러 몸을 아낄 줄 모른다고 늘 말씀하셨다. 돌부리가 많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에서는 항상 내달리고, 나무에 오르거나 돌담 위를 걷다가 떨어지는 일도 많았었다. 열 살 이전이었을까. 높이가 두 길은 될 듯한 논 둑 위에서 얼어 있었던 논바닥으로 슈퍼맨인 양 뛰어내린 적이 있었다. 그 직후에는 무릎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한 동안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에는 학원을 다니겠다며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는데 연탄불을 갈기 귀찮아 한 달 동안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 냉방에서 파카를 뒤집어쓰고 억지로 잠이 들었고 급기야 그해 여름에 무릎에 탈이 났다.

어른들은 ‘게으른 놈이 짐 많이 진다’고 했다. 나눠서 해야 할 일을 두 번 하기 싫어 한 번에 많은 짐을 진다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곧잘 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동네 목수에게 부탁해 작은 지게를 하나 맞춰 주셨고, 일 잘한다는 칭찬은 되도록 커다란 짐을 지도록 나를 부추겼다. 한창 자라나는 몸이라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겠지만 그 흔적들은 고스란히 남았을 것이다.


귀농 후의 생활도 정상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귀농 이듬해부터 달걀 배달로 1주일에 이틀은 밤늦게 귀가하면서 숙면이 필요한 시간에 밖을 돌아다녔고, 그것이 하루 일과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물론 식사는 불규칙했다.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일상이 건전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 원인이 양계와 달걀 배달에 있다고 판단되어, 과도기적으로 농사를 늘리고 닭을 줄인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낮에 농사일이 많아진 탓에 계란을 배달하는 날이면 귀가가 이전보다 더 늦어지게 된 것이다. 농사일도 기계를 가능하면 적게 쓰려고 하다 보니 일이 뒤처져서 몸은 피곤하고 스트레스도 일상화되었다.


내가 귀농해서 가장 성공한 분야는 아무래도 술이다. 귀농하기 전에 나는 혼자서는 술을 전혀 먹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서너 잔 하면 귀가길이 꽤 힘들었다. 귀농 초기에 사부님 댁에서 일을 배울 때 사모님이 새참으로 술을 내오셨는데, 일하다 먹는 술이 맛있기도 했거니와 그 성의에 답하느라 꼬박꼬박 마셨다. 거꾸로 사모님은 내가 서운할까 봐 바쁜 중에도 새참을 거르지 못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농사일 하다가 먹는 술이 점점 늘어나 최근에는 거의 매일 두세 병씩을 해치웠다. 지인들에게는 내가 애주가로 알려져 술 선물이 끊이지 않았다. 빈 술병을 정리하면 술 한 상자를 너끈히 바꿔올 만 했다. 일찍이 열일곱에 배운 담배 또한 한 번도 끊어보지 못하고 날마다 거의 한 갑씩 40년을 넘겨 피워댔으니 그런 생활로 여태 버텨준 몸이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김계수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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