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유족 이숙자의 삶

인터뷰기사

▲ 자료집에서 찾은 어머니와 어린 이숙자

“세상에, 도롱에서 어린애 데리고 끌려간 사람은 니 애미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순사건 당시 도롱 마을에서 월전 지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후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때 돌잡이인 그녀도 같이 끌려갔다. 

“동네 사람들이 밥을 해서 경찰서로 날랐대요. 음력 섣달 스무이레, 그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답디다. 어린애 데리고 가라고. 당시 어린애도 무자비하게 죽였다는데, 어째 나를 데려 가라 했을까. 내 짐작에는 울 엄마아부지가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냐, 어린애만은 살려달라, 하고 매달린 거 같애요. 나를 데리고 왔는데, 밤새 울었대요. 다음 날 일찍 경찰서로 갔더니, 거기 갇혀 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더래요. 다 실려서 공동묘지로 갔다 하드래요. 
생목동 공동묘지로 가서 찾을라고 보니까, 기름을 끼얹었는지, 끄슬러져 가꼬 시꺼매서, 분간을 할 수 없드래요. 쓰러지면서 서로 덮어가꼬, 헤치니까 얼굴이 나오고, 뒤적거리다 보니까 엄마 치맛자락이 보이드래요. 그래가꼬 공동묘지 부근에 둘이 합장했대요. 
스물여섯에 엄마아버지가 보고싶어서 거그를 갔었어요, 가니까 그냥 큰 건물만 들어서가꼬…… 외사촌 오라비를 찾아가 오빠 거그, 할머니랑 밤낮 다녔던, 엄마아부지 묘가 없어져 부렀서……. 보더니, 오라비가 그래요. 아무 소리 하지 마라. 왜냐그면 입도 뜰썩이기 무서울 때니까. 아마 칠십 년돈가, 육십구 년돈가 그랬을 거예요. 아야, 소리도 못 허고, 부모님 저기(유골)도 못 찾고, 가서 건의도 못해보고…….“

이숙자 그녀는 해룡면 도롱리에서 출생했다. 경찰서에 끌려가 있다가 외할머니 손으로 넘겨진 아이가 그녀이다. 
외할아버지 강주영씨는 천도교 도령으로 도롱리에서 교당을 운영했다. 당시 개교당이라 불렸던 천도교당은 지금의 영흥교회 앞에 위치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개교당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아버지 어머니는 개교당 아래채에 살면서 그녀를 낳았다. 아버지는 천도교인으로 처가살이를 했다. 외할머니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는데 그중 둘째딸이 결혼할 무렵에 죽었다. 외할머니는 헛헛한 마음에 여수에 살던 큰딸 부부를 불러들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순천으로 와서 처가살이를 하며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는 근방 사람들의 바느질을 도맡아 하였다.
도롱 마을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과 교회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의해 끌려갔다. 어머니 아버지가 끌려간 뒤 논에서 일하던 외삼촌은 총살당했다. 지목당한 외할아버지는 면장으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 같은 마을에 살던 외할아버지의 4형제 중  두 동생의 가족들도 여러 명이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외할아버지 막내 동생은 순천에 살았던 탓에 목숨을 건졌다. 
외할아버지와 남은 가족은 개교당과 집을 빼앗긴 채 신기마을로 쫓겨났다. 그 뒤 방치되었던 교당은 다른 사람의 명의로 둔갑했는데 그 경위는 아직도 모른다. 당시 마을 사람들을 손가락질 했던 사람은 지금도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 사람의 손가락질에 의해 끌려간 이들은 6,7 가구에서 모두 사십여 명에 이른다. 
친가 쪽은 무사했다. 언니는 친가에서 구박덩이로 자랐다. 어머니아버지 핏줄을 나눠 가진 단  한 점의 혈육이었지만 만나지 못했다. 언니는 자식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서 애도 못 낳고 살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언니가 죽자 오른팔이 빠진 것 같았다. 

뒤로 돌아가라 하면 절대로 못 간다

8살 때부터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며 살았다. 외가에서는 가족이 많으니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그녀를 내보냈다. 아기업개로 보내져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꿈 많은 소녀시절은 없었다. 먹고 살기 바빴다. 차장도 하고 가발 공장도 다녔다. 그 시절 사범학교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울 엄마아부지가 살아 있어 저렇게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항상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살아생전 외할아버지가 했던 “넓은 세상에 나가서 한 가지를 파헤치면 세 가지를 알 것이다”는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샘이 많았던 탓에 동갑내기 외사촌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쫓아다녔다.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는 그녀가 짠했던지 선생님은 나가라는 소리를 못했다. 8살 때 10월엔가 집을 나왔으니 학교를 다닌 것은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책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책 속에서 엄마아부지를 찾았다. 

주철희 박사의 책을 읽던 중 한 장의 사진에 눈이 멎었다. 사진 속 여인과 아이. 아이는 돌잡이쯤으로 보였다. 주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4부 시작되는 쪽에 여인이 어린애를 데리고 찍은 사진이 있는데, 혹시 도롱 사건 아닙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사진은 누가 찍었지요? 미국기잡니다.”

“이거 니 어메야, 니 어메라고.” 

사진을 출력해서 이종삼촌에게 갔다. 
"이거 니 어메야." 
"누구라고요?"
"니 어메라고."
삼촌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울었다. 삼촌은 아픔이 많았다. 여순사건 때 형들이 끌려가 죽었고 손주가 경찰이었다.
“이거 가지고 있으면 큰일 난다. 당장 태워라. 잘못하면 너까지 죽는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무섭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집에 발도 딛지 말아라.”

“워미, 그 세월은 맷돌 속의 좀도 다 갈렸는디, 어찌 니가 살아났냐.”

어머니 아버지 기록을 찾으려고 대한민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세상에 무서운 것도 없었다. 총알이 날아온다 해도 그래 한 번 쏴 보라 할 만큼 대범해졌다. 재소자 증명서를 위해 순천경찰서에 갔을 때 “경찰 유족 기록은 있으나 민간인 유족 기록은 다 불탔다.”고 했다. 
왜 민간인 유족 것만 탔느냐고 묻자, “그 때 그 사람들 묘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고향에서 살고 싶었다. 외가친척은 많았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여순사건 당시 어머니 아버자와 같이 끌려가 죽은 줄 알고 있던 친척은 그녀에게 ‘맷돌 속 좀이 살아왔다’고 했다. 빨갱이로 찍혀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평생을 빨갱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스물두 살 때 결혼 날짜를 잡았으나 “사상이 다른 집안하고는 혼인할 수 없다.”는 파혼 통보를 받았다. 결혼을 안 하리라 결심 했다. 그러나 결혼시키지 않고는 눈을 못 감겠다는 외사촌 오라버니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다. 파혼을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집안내력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늘 마음이 불편했다.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사람 사는데 과거 없는 사람이 있겠느냐며 그는 보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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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 명예를 회복하는 일, 이 일은 내가 아니면 못해요, 자식들은 못해요,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이숙자씨, 보상금 많이 받겄소. 침묵한다. 어찌 말이 없어? 다만 침묵할 뿐이다.

▲ 사진출처 : 주철희, 『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1948, 여순항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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