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환 장로의 항일 운동 이야기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는 순천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 순천에서는 북쪽의 순천과 민간교류를 통해서 민족의 화해와 번영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노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1910년, 3·1 운동의 싹은 평안남도의 순천에서도 움트고 있었다. 당시 순천교회 장로였던 최봉환 장로는 ‘시장세반대투쟁(市場稅反對鬪爭, 일명 百一稅事件)’을 주도하였고 지속적인 납세거부투쟁을 위하여 상무회(商務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상인들의 행동을 통일하여 철시(撤市) 등으로 일제의 조세정책에 대항하였다.
3,000여명의 농민·상인들을 동원하여 시위 항쟁하고, 순천 세무주사 노자와(野澤辰三郎) 등 15명의 일본인들을 살해한 뒤 군청과 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자진 출두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경술국치로 감형되어 2년간 복역한 뒤 출감하였으나, 5년간 연금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3・1독립운동 당시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자산읍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기독교측 대표로 표영각(表永珏)・김성호(金聖浩) 등의 기독교인 및 차철수(車喆洙)・김충성(金忠聖) 등의 천도교인과 힘을 합하여, 기독교인·천도교인·주민 등 2,000여명의 선두에 서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혀서 백일세(百一稅) 투쟁 전력으로 가중처벌이 적용,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최봉환 장로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일세(百一稅) 사건-1909년 4월 통감부의 시장세 제정에 반발해 일어난 사건.
한국을 침탈하는 것은 정치적인 사건만이 아니었다. 농민들에게는 토지를 수탈하고 상인들에게는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하여 경제적으로도 침탈을 계속하였다. 그 중에 순천에서 발생한 납세거부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1909년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통감부령으로 시장세를 제정 공포하고 강제 징수에 나섰다. 이런 불법 착취에 과감하게 항거의 기치를 든 사람들이 평북 순천의 기독교인 중심의 상인들이다. 이들은 납세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철시로 대항하였는데, 이들의 대표는 순천교회 최봉환장로이다. 1910년 1월 29일에 다시 장이 섰을 때 일본인 재무담당 野澤이 상인들의 갓을 찢기까지 하는 야만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강탈하자 상인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며 항거하자 그는 권총을 발사하여 6인을 사살하고 12명에게 중상을 입힌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일본인들의 경찰관 주재소, 상점, 약방, 일본인의 가옥 등을 습격 파괴하였고 그들의 도주로를 차단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물론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지만 납세 거부의 여파는 안주, 영변 등지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폭동으로 간주하였고, 주동자를 최봉환으로 지목하였다. 그들이 상부에 올린 보고서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번 순천폭동 사건의 주모자 괴수 최봉환은 예수교 장로회 순천교회 주재자로서 그 추종자 교인 김성호, 최진환 등 2인의 보필을 받고 집사 최학성과 더불어 사건을 계획했는데, 특히 김성호, 최학봉은 상민회(商民會)의 회원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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