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순의 『절망 뒤에 오는 것』

 

문학작품에서 역사적 사실은 사실 그대로 서술될 때보다 작가의 주체적인 역사의식과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재해석될 때 더욱 그 빛을 발한다. 다시 말해, 작가의 균형 있는 역사의식이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제대로 형상화되었을 때 왜곡된 역사적 사실은 객관성과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전병순의 『절망 뒤에 오는 것』은 여순사건 진압 직후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휴전에 이르는 역사적 격랑 속에서 작중인물들이 겪는 삶의 질곡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여순사건의 발생 배경이나 전개 과정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해왔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현장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하나만으로 이 작품은 주목할 만하다.
  전병순이 여순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소설 속에 담아낸 이유는 그녀의 부채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병순은 갓 스물의 나이에 직접 여순사건을 체험하였고 이후 이 사건이 허위 소문에서 역사적 사실로, 나아가 역사적 진실로 왜곡되고 은폐되는 과정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작가의 아픔과 회한이 여순사건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작가의 직접적 체험이 바탕이 된 만큼 작품 속에는 여순사건 진압 작전의 폭력성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진압과정 중 빚어진 민간인들의 수난과 억울함은 주인공 강서경의 시각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광기의 현장”에서 빨갱이로 지적되는 순간 변명의 겨를도, 진압군의 동정이나 이해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즉결처형이 이루어졌다. 객관적 근거 없이 이루어진 색출작업은 개인적인 앙심을 개입시킬 여지가 다분했다. 그러나 이미 여수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진압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진압군의 혹독한 처벌방식은 시민의 과잉진압에 대한 불만들을 묵살한 채 정당화되었다.
  이처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등, 소박한 삶을 파괴하고 생존조차 위협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소설 속에서 사실성 있게 재현된다. 그러나 서사의 중심틀은 강서경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애정 관계이다. 비극적인 역사의 격랑은 강서경의 연애사를 이끌어가는 배경적인 요인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단순 애정소설로 평가받지 않는 이유는 강서경을 비롯한 작품 속 인물들이 역사적 통찰력을 갖춘 이들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작중인물을 내세워 개인적 사건과 역사적 사건을 조화시켜 소설의 사실성과 재미를 동시에 추구한다. 
  강서경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급변하는 역사적 현실과 당당하게 맞서기보다 모든 “사태를 방관하고” “죽지 않고 지혜대로” 살아남는 것에 열중하는 인물로 변화한다. 그런데 이는 부정적으로 비춰지기보다 그녀가 역사적 현장과 거리를 둠으로써 “피해자들끼리 서로 눈을 부릅뜨고 서로 미워”하기보다는 “모두 다 불쌍한 민족”이라는 포용력을 갖게 된 것이라 해석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작가는 치열한 이념대립이나 감정적인 처벌행위에서 한 발 물러나 용서와 화해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말미에서 서경의 눈에 비친 “하얀 태양빛” 아래 “초록의 나무들”과 “푸른 하늘”은 희망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그녀가 “불구의 남편과 무능한 가족들”을 부담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강한 삶에의 의욕”을 가지고 함께 아픔을 헤쳐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결말을 통해 우리는 시련을 극복하고 주어진 삶을 살아 내고자 하는 민초들의 소망과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전병순의 『절망 뒤에 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고발하고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절망과 연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에의 복원의지와 희망을 이어가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여순항쟁 70년을 맞이한 지금, 서경의 의지와 바람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울림을 가져다준다. 이제는 방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민족적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진실 구명에 힘써야 한다.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찍힌 경멸적인 낙인을 지우고 후손들에게 남겨진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되돌려 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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