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은 ‘선향(仙鄕) 순천’이라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승선교(昇仙橋)・강선루(降仙樓)・죽학(竹鶴)・봉래산(蓬萊山) 등 신선과 관련한 명칭이 순천에 존재하고, 또 이수광(李睟光,1563-1628)・유몽인(柳夢寅,1599-1623)・성이호(成彛鎬,1817-1895)를 비롯한 여러 선인들이 지리적으로 방장산[지리산]과 영주산[한라산] 사이에 위치하면서 풍광이 수려한 순천을 선구(仙區)・선계(仙界)・선도(仙都)라고 일컬었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2018년 4월 5일자 기사를 참고하면 좋겠다.
1543년 10월에 순천부사로 부임한 심통원(沈通源)은 1546년 가을 이전에 순천읍성 동문 밖 동천(東川) 가에 강무정(講武亭)을 완공하였다. 이후 그는 강무정을 환선정(喚仙亭)으로 개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방장과 영주를 오가는 신선이 노니는 장소 인식 및 벼슬길의 고뇌를 해소할 만한 이상향을 찾고자 한 것인 듯하다. 환선정의 위치는 오늘날 동외동 동문외1길과 감사터3길 사이로 추정된다. 1872년 전후 환선정 앞 동천은 고리모양의 호수를 이루었으며, 여기서 뱃놀이가 행해졌다. 지금의 동천 주변 모습과 비교해 다르다고 의아해 할 수 있는데, 이는 1962년 8월 27일 내린 폭우에 쓸려나간 제방을 다시 축조하면서 물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활쏘기와 같은 무예 강습과 휴식의 기능을 가진 환선정은 순천부사 신익(申翌)이 1583년 처음 중수하였고, 1592년 3월 16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그곳에서 활을 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된 것을 순천부사 유순익(柳舜翼,1559-1632)이 1613년 겨울 전에 중수하였다. 또 1705년 순천부사 김덕항(金德恒,1649-?), 1761년 순천부사 구수국(具壽國,1725-?)이 중수하였다. 1790년 윤광안(尹光顔)은 환선정을 중수하여 무예 강습, 선비들의 학업 공간, 빈객 대접 장소로 활용하였다. 이 무렵에 동천은 환선정 앞에서 둥근 고리모양의 호수를 형성하였다. 이후 1826년 순천부사 김정균(金鼎均,1782-1847)이 중수하였고, 1871년 순천부사 성이호(成彛鎬)는 환선정을 중수하고 동천 가운데에 신선을 만나는 곳이라 하여 우선정(遇仙亭)도 지었다.
일제강점기 때 환선정은 두 가지 길로 나뉜다. 하나는 동천 가에 있던 환선정은 송광사와 선암사에 의해 1913년 불상이 안치되고 승속(僧俗)의 염불수행을 위해 백련사(白蓮社)가 결성되는 등 불교 포교당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농민대회장 및 순천공립보통학교 임시건물 등으로 사용되었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교회건물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1962년 8월 수해 때 유실되었다.
다른 하나는 강무를 위한 활쏘기, 즉 사정(射亭) 기능 존속을 위해 1935년 사두(射頭) 서병규(徐丙奎)가 현 조곡동 죽도봉공원 남쪽 흥륜사 자리에 김종익(金鍾翊) 등 17인의 성금으로 사정을 신축하였다. 이를 1964년 윤기술(尹箕述) 등 40인이 중수하였고, 이후 관혁장 설치 및 보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984년 민원이 제기되어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실된 동천 가 환선정 복원이자 사정 기능까지 통합한 환선정이 1988년 4월에 현 죽도봉공원 내의 흥륜사 맞은편인 장대길 72[조곡동 278-25]에 완공되었고, 이것이 지금에까지 이른다. 환선정 편액은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1563-1632)가 쓴 것과 순천부사 이범진(李範晉,1852-1910)이 쓴 것이 있다. 한편 순천시는 이와 별도로 2017년에 연향동 팔마체육공원 부지 내에 국궁(國弓)을 위한 장소를 신축하였는데, 그 이름을 또 환선정이라 지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순천을 말할 경우에는 읍성 남문 문루인 연자루(燕子樓)를 비롯해 환선정, 그리고 거기서 바라보는 풍광을 꼭 거론하였다. 순천의 정체성인 ‘소강남 순천’과 ‘선향 순천’이 바로 이 두 누정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환선정은 연자루와 함께 순천의 랜드마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