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농사에 흔히 쓰이는 바퀴 둘 달린 수레를 끌고 산길을 올라가는 일만 해도 비지땀을 흘릴 만큼 힘이 들었다. 첫날은 욕심 사납게도 상당히 굵은 소나무 둥치를 톱으로 잘라 수레에 가득 실었다. 그런데 비탈진 길을 내려갈 때 문제가 발생했다. 가파른 경사에다 나무 무게까지 실리니 수레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속도가 붙었다. 나는 거의 수레에 끌려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고 간신히 집에 돌아왔을 때는 탈진이 될 정도로 힘이 빠져버렸다.

다음날 나무하러 가서는 욕심을 버리고 전날의 절반 정도 나무만 수레에 실었다. 나는 석양의 노을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휘파람까지 불면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굵은 소나무 둥치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있을 때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겨울 날씨처럼 기온이 떨어졌다. 아궁이에 지핀 소나무들이 투닥투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솔방울들은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타올랐다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방에 들어와서 쿡 티브이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았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집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 파이의 이야기였다. 소년은 인도의 중산층 집안에서 엄격하지만 자상한 아버지와 자애롭고 사려 깊은 어머니 밑에서 역시 사려 깊고도 개성이 강한,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물원 운영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는 동물들을 캐나다에 팔기 위해 배에 태우고 가족들과 캐나다까지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런데 그만 망망대해에서 극심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아버지, 어머니, 형까지 모두 익사하고 파이만 살아남게 된다. 파이가 극적으로 구명보트에 몸을 실었을 때 구명보트엔 얼룩말과 오랑우탕과 하이에나가 한 마리씩 동승하게 되었다. 거기다 풍랑을 헤엄쳐 나온 호랑이 한 마리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그 호랑이의 이름은 리차드 파커였다. 영화의 제목이 ‘라이프 오브 파이’였지만 실은 ‘파이와 파커’ 정도로 제목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파커의 역할은 중요했다. 파이 스스로도 고백하지만 호랑이 파커가 없었다면 파이가 망망대해를 한 척의 보트에 의지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호랑이는 실재의 호랑이가 아니라 파이의 또다른 자아였을 것이다. 파이가 보트에서 발견한 ‘난파시 서바이벌 매뉴얼’이라는 책자를 보며 험난한 표류를 이어가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지침이 있다. ‘바닷물을 마시지 말라’로부터 시작하는 여러 지침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떤 경우에도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였다. 호랑이는 바로 그 중요한 지침을 수행하게 하는 하나의 구체적 형상물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떠올린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은 무겁고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은 가벼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욕심을 부려 나무를 잔뜩 해 온 날 나는 거의 탈진이 되어서 저녁내 끙끙 앓아야만 했다. 그런데 다음날 욕심을 버리고 나무둥치 두어 개만 해 온 날 나는 아궁이에 적당히 불을 지피고 훈훈해진 방에서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자도 감독도 몸에 힘을 빼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에피소드에 비상한 상상력을 끌어내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인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글 쓰는 사람도 그림 그리는 사람도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도 생각은 깊게 하되 표현은 가벼워야 한다. 그래야만 풍부한 예술 세계로 다른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저명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명언 한 마디를 떠올려 본다. “Das Leben ist ernst, aber Die Kunst ist heiter.” 삶은 진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발랄한 것이다.

송태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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