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계수 조합원

지난 6월 중순부터 광주 가톨릭신학교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열흘 일정으로 우리 마을에 농촌활동을 왔다. 광주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 전주와 제주교구 소속 학생들을 뺀 광주교구 소속 2학년 학생 8명이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농사나 농촌에 대한 경험을 가진 우리 본당(벌교성당) 출신 학생이 우리 지역을 제안했고, 신부님이 이들을 우리 마을로 보낸 것이었다. 신학생들은 성당 공소에서 숙박하기를 바랐지만 그 경우 편하게만 지내고 갈 거라고 판단한 신부님의 결정이다.

신학생들을 떠맡은 나는 뜻밖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군 생활을 포함해 10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사제 서품을 받으면 도시 본당의 보좌 신부를 거쳐 초창기에는 주로 농촌 지역에 있는 작은 본당의 주임 신부를 맡는 게 대체로 이들의 앞날에 예비된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농업과 농촌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사회의 어느 부문 못지않게 사목적인 관심과 노력이 집중되어야 할 곳이 농촌이고, 농촌활동은 이 학생들이 사제 수업을 받는 동안 농촌을 체험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나의 학생 시절 농촌활동을 되돌아보면 꽤 멋쩍은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일주일짜리 농촌활동을 서너 차례 다녀왔는데, 그 때는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을 선도하던 때라 농촌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농민들을 지도한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사전에 학습을 통해 당시의 농촌과 농업 현실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농민들이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나설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고 농민들에 버금갈 만큼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분반 활동을 통해 농민들을 ‘의식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더위와 농사일로 지친 농민들을 밤에 모이게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어렵사리 모인다 한들 계획했던 주제들로 토론을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농업과 농사일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과 인식 없이 관념적으로 농민들에게 접근하려고 했던 것은 무모하고 섣부른 욕심이었다. 차라리 겸허한 자세로 농민들과 함께 있는 가운데 농사일의 어려움과 농민들이 겪고 있는 애환 등을 몸으로 느끼면서 유대감을 키우는 쪽으로 소박하게 접근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하고 농사꾼이 된 후 가끔 생각했다.

첫날 오후에 마을에 도착한 학생들에게 오늘의 농촌 현실에 대해 간단한 안내 겸 교육을 했다. 현재 우리 농촌은 세 가지 차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선 국가의 경제 정책에서 농업은 철저하게 경시되고 희생되고 있다는 것(농업 문제), 다음으로 농민들의 노령화와 인구 감소, 대농과 소농 간의 격차 확대 등으로 마을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는 점(농촌 문제), 농민들의 노령화에 따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만연, 노동력 상실에 따른 빈곤화, 결혼이주여성과 농업노동자의 증가 등(농민 문제)을 얘기하며 농촌에 대해 감상적인 관심 대신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바라보라고 부탁했다.

아울러 신학 혹은 신앙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관념적인 경향으로 흐르기 쉬운데 육체적 활동으로 사고의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농사일을 그러한 필요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는 활동이라는 것, 또한 농사일은 하느님의 일을 지상에서 대행하는 것이므로 사목활동 못지않게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을 일이다, 노동을 할 수 있는 몸은 진정한 쾌락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요지로 이야기했다.

학생들은 워낙에 평범하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인지라 동네 주민들에게 인사도 잘 하고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농사일도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해 주었다. 낮의 노동으로 피곤한지 밤엔 걱정했던 술 파티 없이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체험으로 하루 왔다 가는 학생들과는 달리 일의 결과를 예측하여 대처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사제 지원자가 갈수록 줄어드는 터라 신학생은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모든 교육의 결과를 당장 확인할 수 없듯이 열흘간 낯설고 힘든 경험이 성직자로 살아갈 이들에게 어떤 영향으로 남을지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게 잘 되기를 기원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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