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지역의 영어교사가 주축이 된 9명이 히말라야 산맥의 안나푸르나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모두 인생의 여정을 상당히 걸어온 사람들이다. 인문적 여행을 꿈꾸며 스스로 경로를 기획하고 여행일정도 잡는 등 여행의 전 과정을 즐기는 트래킹을 하고 왔다. 그들의 꿈같았던 8박9일의 여행기를 3회에 거쳐 싣는다. <편집자 주>
▲ 해발 2000미터에 있는 교회-모든 종교가 다툼없이 잘 지낸다.
▲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까이 있는 세분의 위령비. 누군가 윤봉길의사의 사진을 놓고 갔다.


포카라 레스토랑에서 아리랑 공연
9일간의 산행을 마치고 1월 29일 무사히 포카라에 생환하였다. 드디어 포터들과 이별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고마움, 감사함, 미안함, 안타까움의 정을 풀기 위해서 함께 식사를 하였다. 그들이 좋아한다는 삼겹살에 맥주를 시켜 즐겁게 먹고 마셨다. 식사가 끝나고 포터를 한 사람씩 포옹하고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누구는 눈시울이 젖기도 하였다. 친구들이여!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저녁에는 숙소 가까이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러 보았다. 행운의 팔찌, 네팔 모자 와펜도 여러 개 사고 작은 징(SINGING BOWL)도 울려보고 히말라야 풍경이 그려진 그림도 구입하였다. 포카라의 명소라는 페화호 호숫가를 거닐었으나 늦은 시간이라서 아주 어두웠다. 그래서 “Nepal Folk Dance”라고 쓰인 식당으로 들어갔다. 맥주와 안주를 시켜 마시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민속춤과 노래와 연주를 관람하였다. 무대 뒤편에 밴드는 우리나라 사물과 비슷한 네팔의 전통악기를 연주하였다. 네 명의 젊은 남녀들이 민속춤을 추었다. 화이트의 제안으로 웨이터에게 부탁하여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신사숙녀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왔습니다. 여러분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민요 진도아리랑을 부르겠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만 앵콜은 없었다. 이후 네팔 민요 레쌈 삐리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포카라의 밤은 깊어갔다.

생과 사가 맞닿아 있는 카트만두

다음 날 아침 카트만두행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포카라 공항으로 나섰다. 공항이라야 큰 공원에 순천 버스터미널 크기의 공항 대합실이었다. 또 다시 무진장 기다려 겨우 비행기를 타고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도심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더르바르 광장에 갔다. 소문대로 좁고 지저분한 도로에 관광객과 상인들과 오토바이, 먼지와 매연이 가득하였다. 마스크를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사원과 왕궁 등을 방문했는데 고대건축과 현대적 일상이 섞여있는 다소 생경한 모습을 보았다. 많은 네팔인들이 지금도 믿고 있는 ‘살아있는 신’이라는 세 살 여아 ‘쿠마리’의 분장을 한 얼굴도 살짝 보았다. 여성으로서 생리가 시작되면 그 자리를 다른 아이에게 넘겨주어야 한단다.

▲ 매연과 먼지 투성이인 더르바르광장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오래된 건물에는 인도 카주라호를 연상시키는 대담하고 에로틱한 아주 섬세한 조각상을 보았다. 인간의 성애의 장면들을 장인들은 능숙하게 나무에 조각해 놓았다. 카마수트라라고 알려진 인도의 성애(性愛) 경전이 예술작품이자 문화유산으로서 보전되어 있었다. 아마도 노동력이 중요했던 농경시대 다산(多産)에 대한 그들의 염원이 인간의 기본욕구와 결합되어 공개적인 교육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여겨진다.
 

▲ 농경사회의 다산을 비는 의식으로 고건물 곳곳에 남여의 성애를 표현했다

다음날 우리는 택시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약 15km 떨어져 있는 박타푸르(Bhaktapur) 광장을 방문했다. 18세기 샤왕조가 카트만두로 옮기기 전까지 인도, 티베트와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으며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라 한다. 여기도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빼곡하다. 가루다의 조각상이 인상 깊었다. 비시누신이 타고 다니는 것이 가루다란다. 우리나라는 봉황을 국장(國章)으로 사용하지만 태국과 인도네시아 국장이 바로 가루다라 한다. 인도네시아 항공사 이름에 가루다가 있다.
 

▲ 힌두교이 아니라고 입장거부 당한 사원 앞에서
▲ 힌두교의 상징 코브라상 앞에서

박타푸르 관광을 마치고 다시 카트만두 파슈파티나트 힌두사원과 바그마티강가에서 진행되는 화장(火葬)하는 장면을 보았다. 얼굴을 내민 망자는 메리골드 꽃을 얹은 옷을 걸치고 강가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힌두교는 윤회를 믿는다고 하지만 이별은 온 인류의 아픔임에 분명하다. 망자의 아내는 오열하고 아들은 망자의 몸에 머리를 묻고 울면서 얼굴도 씻겨주는 듯하다. 옆 화장장에는 막 새로운 불이 지펴졌다. 맨발도 보인다. 하얀 머리털도 바람에 날린다. 저 여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죽음이 임박했을 때 훗날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윤회될까 생각해 보았을까?

▲ 화장 직전의 이별장면

그날 생명의 시작점인 사랑과 종점인 장례식을 보았다. 삶과 죽음 모두 본 셈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게 본질적으로 사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 손님을 기다리는 장례용품점들

여행에 대한 단상
사람들은 왜 여행을 할까? 탈출, 해방, 여유, 스트레스, 비행기, 박물관, 맛있는 음식, 하늘, 낯선 장소와 사람에 대한 환타지 등등. 여행은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해방감에 젖게 하는 마약과 같기도 하지만, 새롭고 더 안락한 무엇을 찾기 위해 떠났다가 ‘역시  집이 최고야’하며 돌아오는 시계추와 같기도 하다. 

현실이론의 대가 심리학자 W. 글라써는 사람들은 ‘자유와 즐거움’ 그리고 ‘안정과 소속’의 욕구가 서로 충돌하여 갈등하는 존재라고 하였는데 그런 갈등은 우리 내면에서도 일어난다. 

여행은 동반자들과 그리고 자기 내부에서 그런 갈등을 경험하고 조정하며 조화로운 삶을 이끄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떠나기를 주저한다. 흔히 돈과 시간과 건강, 즉 여유가 없다고 한다. 이들은 ‘여유가 있어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함으로써 여유가 생긴다.’라는 격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행을 떠나면 자신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에서 행복하게 사는 이들을 만나는가 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이들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삶의 조건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자족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또한 여행은 가장 단기간에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도록 강제한다. 그때마다 자신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해서 안전과 생존과 만족을 동시에 이루어야 한다. 그만큼 생각이 깊어지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은 사람은 그 책 한 페이지만을 읽을 따름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히말라야보다 더 높고, 모디강 계곡보다 더 깊은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혼자서 어렵지만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함께 하는 동안 서로 욕구가 부딪치며 우리 사랑의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히말라야도 아름답고 위대했지만 악천후와 험난한 비탈에서도 밭을 일구며 생명을 이어가는 인간의 적응력과 위대함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풍광이 전해 주는 메시지 또한 많았다. 이를테면 비행기에서 히말라야를 바라보니 구름이 저 산 아래쪽에 머물러 있었다. 내공이 깊은 이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터키의 사상가이자 혁명가이자 시인 나짐 히크메트는 노래했다. “어느 길로 가야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그대, 일상이 답답하거든 떠나라. <끝>


글 안나푸르나 여행단/ 정리 박발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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